[크리스챤연합신문]김준곤 목사로 인해 설립된 봉리교회 연혁 문서 공개(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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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목사로 인해 설립된 봉리교회 연혁 문서 공개
봉리교회 최용호 목사, 펜글씨로 쓰여진 문서 세계성시화에 전달

신안군 지도읍 봉리에 위치한 봉리교회가 고 김준곤 목사에 의해 1951년 4월15일에 시작됐다는 문서가 공개됐다.
문준경 전도사가 복음사역을 할 때 친척인 김준곤 목사 집에 며칠씩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봉리교회가 김준곤 목사의 첫 복음전파로 시작됐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김철영 목사는 9월29일, 김준곤 목사 서거 13주기를 맞아 <봉리교회 연혁>에 기록된 “1951년 4월15일 김준곤 목사의 첫 복음전파로 시작되다”라는 부분을 공개했다. 김 목사는 9월26~27일 봉리교회 최용호 목사를 만나 펜글씨로 쓰여진 교회 연혁 문서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이 문서에 따르면 고 김준곤 목사는 송리복 전도사를 봉리교회 초대 전도사로 청빙할 수 있도록 주선한 사실도 나타나 있다.
봉리교회는 1952년 4월 송희복 전도사가 사임을 하고, 1952년 5월 감정리 소재 백련교회로 전 성도들이 임시 출석을 했다. 그리고 1954년 9월 다시 봉리 원동 소재 박금례 집사 댁에서 모였다.
1955년 9월에는 서동 남집사 댁에서 모였으며, 1958년 3월 24일 김재권 전도사가 부임해 1960년 4월 7일 원동에 16평의 초가 교회당을 건축했다. 1965년 4월 김재관 전도사가 사임하고 1966년 2월 7일 박형구 전도사가 부임해 1970년 5월까지 시무했다. 이어 1970년 10월 15일 정재원 전도사가 부임해 1972년 10월까지 시무했다.

1972년 11월 13일 이영조 전도사가 부임했으며, 1972년 12월 1일 성가대가 조직됐다. 교회가 그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973년 1월 1일 교회당 신축안이 통과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준곤 목사는 봉리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해 밭을 기증하고 큰 액수의 건축헌금을 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아픔 속에서 봉리교회 시작의 첫 복음의 씨앗을 뿌린 김준곤 목사는 1951년 9월 13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철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은 ‘사과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으나 씨앗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수많은 열매가 맺어진다는 말씀”이라며 “한국교회 교인수가 많이 감소했고, 전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대학생선교회(대표 박성민 목사)와 세계성시화운동본부(대표회장 김상복 전용태)는 8월2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1차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데 이어 11월7일 신안군 증도면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서 ‘김준곤 목사 선양 제2차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제2차 학술심포지엄에는 주도홍 박사(총신대 초빙교수, 백석대 전 부총장)가 ‘김준곤 목사의 통일운동’에 대해 발제하고 안인섭 교수(총신대 신대원)가 논찬을 담당한다.
‘문준경 전도사와 김준곤 목사의 영적 계승’을 주제로 이은선 교수(안양대)가 발제하고 김호욱 교수(광신대)가 논찬을 한다.
또한 ‘신안군 관광문화와 김준곤 목사’를 주제로 곽행구 박사(광주전남연구원)가 발제하고 황종환 박사(지식공유상생네트워크 이사장)가 논찬을 담당한다.
한편 학술심포지엄 개최에 맞춰 순교기념관에서는 ‘김준곤 목사 어록전시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경래 기자 cup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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