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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파워][홍정길 목사] 나의 젊은 날과 CCC(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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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CM (1.♡.198.116)
댓글 0건 조회 350회 작성일 24-09-03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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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 나의 젊은 날과 CCC

한국CCC 총무 역임 후 남서울교회, 남서울은혜교회 담임목회
 
홍정길icon_mail.gif   기사입력 2024/08/18 [17:35]

*이 글은 [엑스플로 '74 50주년 회고와 전망]에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가 기고한 글이다.(뉴스파워)


▲ 남서울교회 은퇴선교사 은퇴식에서 홍정길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뉴스파워 자료사진

 

 

CCC는 나의 인생에서나의 신앙에 있어서 젊은 날 그 자체였다주님의 크신 사랑은 충격으로 다가왔고서툴렀으나 나를 열정으로 가득하게 했다서서평 선교사의 복음 전도로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지만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방황했던 어린 시절을 떠나 대학 시절 입석수양회를 통해서 만난 주님은 나의 삶을 온전하고도 확연하게 변화시켜 주셨다그러했기에 CCC는 나의 젊은 날 그 자체인 것이다.

 

I) 젊은 날의 우리 시대

 

공허한 젊은 날

안타깝게도 처음 고향 함평에서 부푼 꿈을 않고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된 나의 현실은 젊음이라는 단어처럼 싱그럽거나 빛나는 형태는 아니었다이는 비단 개인의 현실뿐 아니라 1960년대의 우리나라의 모두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도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당시 한국 사회는 부족했고 혼란스러웠으며 공허했다국가는 전쟁으로 인한 나라의 재건에 정신이 없었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생존하는 문제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그러한 현실을 염려하고 변화된 미래를 꿈꾸고자 했던 젊은이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한 줄기의 희망도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참으로 목마른 시대였다.

때로는 인간에게 배고픔보다 희망에 굶주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고 했던가덩치만 컸지 늘 배고픈 젊은 대학생들을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로했던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당시는 젊은이들이 갈 곳이 부족한 때였다요즘처럼 볼거리가 넘쳐나고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의 유흥을 제공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지난날이 연결되지 않는다서울이 세계 유행의 중심이라는데, 1960당시 나에게 최고로 큰 도시였던 그 서울에 처음 생긴 다방이 규모가 작은 돌체규모가 큰 르네상스에서 음악을 듣는것이 우리의 유일한 여가였다.담배 연기가 자욱한 다방에 대형 스피커를 걸어놓고 음악을 틀어주면 갈 데 없는 젊은이들은 입추의 여지 없이 좁은 공간에 앉아 명곡을 듣곤 했다이렇게 집중되는 현상은 4.19로 학교가 문을 닫고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더 심해졌고그렇게 나는 테너 비욜링을 알게 되고 영화음악에 심취하며 사회자의 해설을 듣고 음악을 앎으로 공허한 마음에 위안을 삼았다.

이렇게 음악다방이라도 가지 않으면 갈 데 없는 학생들은 기껏해야 또 할 수 있던 것이 등산이었다지금은 등산로도 좋고 산림도 잘 가꾸어졌지만당시는 전쟁으로 산이 헐벗고 등산로도 제대로 닦이지 않았건만 도봉산에 오르면 그나마 막혔던 숨통을 조금 트였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좌를 경청하는 것이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어려웠던 것은 개인적으로도국가적으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대학을 진학했건만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시원하게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당시 우리나라에 교육전문가가 전무했다. 6.25를 기점으로 지식인을 포함한 많은 사상자가 있었고 그나마 있던 지식인들은 대부분 북으로 갔기에 남겨진 이 땅의 교육자의 수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그것도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대다수의 대학교 교수는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현저하게 부족한 숫자로 인해 대학 강의를 하게 된 분들이다내가 전공한 철학계에도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시던 분들이 대부분이었다그런 시대에 학교 밖에서 간혹 들여지던 강좌는 우리에게 그 암담한 시대에 귀를 열고 들어야 할 지식의 보고 그 자체였다젊은이들은 오늘 어디에서 강좌가 열린다면 모두 열 일을 제쳐두고 가서 강의를 들으며 지식의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했다지금도 기억나는 대표적인 강사가 몇 분 있는데 유영모노평구함석헌 선생 그리고 경동교회의 강원용 목사이다.

 

내 눈에 비쳤던 유영모 선생은 신선과 같은 분이었다그분을 뵐 당시는 74세의 어르신이셨는데인왕산을 병풍처럼 뒤로한 체 자문 밖에서 백발에 흰 수염이 가득하고 두루마기 차림으로 강의했기에 90이 넘은아니 신선 같은 외모라고 생각했다동양사상을 바탕으로 서구문화 그리고 기독교를 해석하는 강의는 지금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될 일이지만 그분의 위엄에 눌려 모든 것이 이해된 것처럼 느껴지는 매력을 주곤 했다.

 

거기와 비교하면 노평구 선생의 강의는 쉬운 전달력과 함께 조용히 스며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김교신 선생의 무교회주의 입장에서 로마서를 설명했는데목요일(일요일)마다 YMCA에서 강의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그의 깊은 연구는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에 뿌리를 두어 서구학자들과 다르게 동양적 전략으로 청중을 인도했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그의 메시지를 다시 생각하며 자주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함석헌 선생은 노평구 선생처럼 YMCA에서 자주 강좌를 했는데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고와 지식이 담긴 메시지가 당시 뜻있는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다특별히 그의 방대한 독서 범위는 듣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주었다쉘리휠덜린토마스 칼라일칼릴 지브란 등 서구의 저명한 시인철학자명상가들의 사상을 통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힘 있게 말해주었고청년들이 가장 애독하던 잡지인 사상계에 계속해서 나왔기에 당시 사상가 중에서 그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또한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사상은 더 깊이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교회 안에서는 경동교회의 강원용 목사가 유일하게 청년에 대한 메시지가 있었다고 기억된다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이 교회와 교리라는 틀에 갇혀 메시지를 전했기에 의문이 많은 청년들이 사회보다 왜 기독교는 이처럼 왜소한가?’, ‘왜 경직되어 있는가?’라는 고민을 할 때에 그는 청년의 시선에 맞추어 신학 안에서 자유롭게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내일

젊은이들이 이처럼 강좌를 찾아다니며 귀를 기울였던 것은 지식에 대한 목마름도 컸지만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정치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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