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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파워][박응규 교수] Explo ’74와 한국 교회사적 의미(20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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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CM (121.♡.133.199)
댓글 0건 조회 350회 작성일 24-09-2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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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응규 교수] Explo ’74와 한국 교회사적 의미

박응규 교수(아신대, 역사신학)
 
박응규icon_mail.gif   기사입력 2024/09/07 [20:54]

 이 글은 박응규 교수(아신대, 역사신학)가 엑스플로 '74대회 50주년 기념문집에 기고한 것을 뉴스파워에 재게재한다. 가독성을 위해 각주는 생략하고 싣는다.(뉴스파워) 


▲ 엑스플로 '74대회     ©뉴스파워

1. 여는 말

1970년대 한국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도약을 위한 진통을 겪으면서 미래를 개척하던 시기에 놓여 있었다남북분단의 긴장 국면에서 6.25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군부 통치 시대 속에서 경제 발전이라는 구호 아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라는 과제를 시행하고 있었다서구에서 이룬 경제 발전과 민주화는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그대로 진행될 수는 없었고 한국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1970년대 한국은 경제와 정치의 총체적 문제를 안고 미래를 개척하던 시기였다고 특징화 할 수 있다.이 시기에 한국교회에 일어났던 엑스플로 ’74 대회는 급격한 변화와 위기를 경험하던 상황을 잘 극복하고 한국 민족과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잘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본고는 엑스플로 ’74의 역사적 배경을 1970년대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이 대회에 미친 김준곤 목사의 영향력을 고찰하며엑스플로 ’74의 한국 교회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2. 엑스플로 ’74의 역사적 배경

2-1. 1970년대의 한국 사회

1970년대 초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월남전에 시달린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를 원했고또한 미국은 월남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여기에 북한은 계속 남침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한국에서는 반정부 운동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소수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했지만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안보를 염려하고 있었다.

 

또한 현재의 한국 사회와 교회의 특성을 이해하려면, 1970년대의 정치·문화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이 시대를 미국의 주요 언론보도를 중심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연구한 이영관은 이렇게 언급하였다.

 

1970년대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대통령에 이어 지미 카터 (Jimmy Carter) 대통령까지 주한미군 감 축을 추진하면서 안보에 대한 위협은 물론 미국에 대한 신뢰에 더 이상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동시에 625 전쟁 이후 칩거하던 북한의 김일성이 베이징과 동유럽국가들을 방문하면서 외교적으로도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던 시 기였다경제력 역시 1970년대 초반에는 북한에 뒤지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의 남침 위협 속에서 안보가 불안한 상황이었지만,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1970년대 한국인들에게 경제발전이야말로 최대의 열망이었고 또한 필수적인 과제였다저임금제도에 기반한 경제구조를 통해 추구하는 경제발전 정책은 비민주적 인권유린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사회적인 문제들을 양산하였다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도 이 시기에 급속도로 발전해 가는 경제적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동시에 한국의 비민주적 처사들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았다한국은 많은 위험성을 안고 있지만머지않아 저개발국가에서 개발도상 국가가 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고북한의 위협과 경제발전에 대한 열망으로 비민주적인 정치체제를 묵인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도 존재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외국인의 눈에 비친 그 시대의 한국은 민주주의가 파괴된 암울한 시기만이 아닌 생동감 넘치고 희망 또한 공존했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유신이라는 반민주적 체제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고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함께 가야 하는 가치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그렇지 아니했다세계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상황에서도 한국은 1974년 전반기에 15%라는 경이적인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오히려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한 성장통이 정치보다 한국 내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였고급격한 인플레이션구조조정 등이 사회문제가 되었고이런 고통이 정치적 이슈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에서 중산층의 형성에 있어서 새로운 요소가 부각되고 있었다한국은 전통적으로 사회계층을 구분할 때 자신의 가족이나 교육 배경이 주요한 잣대였으나,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개인의 수입이 사회계층을 구분하는 잣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바야흐로 한강의 기적을 경험하면서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자신의 노력과 교육을 통해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변화하는 한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한국의 경제발전이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사회적으로도 한국은 더 이상 농업국이나 저개발국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6.25 전쟁의 폐허를 딛고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한국인들에게 경제발전은 가장 중요한 과제였고이것을 추진하는 군사정부에 대한 신뢰와 민주주의 파괴라는 심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에 대한 사회적 과제가 심각하게 부상하고 있었다경제적 발전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헌신이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지만비민주적 인권유린이 1970년대 중반의 한국의 국가적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었다.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이르게 되면급속한 경제적 발전은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당시 미국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외국 언론들에 비쳐진 한국의 모습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내용도 많았지만대체로 획기적인 경제발전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위상은 경제발전과 함께 재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30년 전 잿더미에서 시작 해 기적을 이루어낸 국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물론 미국의 시각이었지만 당시 냉전 시대의 분위기에서 미국의 위상을 볼 때 한국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더 이상 원조를 받아 연명하는 국가가 아니라 모든 저개발국가는 물론 개발도상국에도 모델이 되는 국가로 변모했다.

 

어느 시대나 사회와 같이, 1970년대 한국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모두를 갖고 있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던 매우 생동감이 넘치는 역동적인 시기가 1970년대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이 시기가 현재 한국의 틀을 제공한 시기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또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시각이 시기와 상황에 따라 변화했지만이 시기에 한국의 위상에 대한 재정립의 과정이 전개되고 있었다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한국은 6. 25전쟁 후 원조로 연명하던 국가에서 무역의 파트너로 성장했고미국의 중요한 외교적 파트너로 성장하는 발판을 제공한 계기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유신체제로 인해 한국의 경제발전보다는 정치적 상황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미국의 시각에서는 유신체제 같은 반민주적 정부 체제에서 경제발전이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었다민주주의와 인권자유시장경제를 대변하는 미국으로서는 한국에 대해 원조를 삭감하거나 압력을 가해 한국정부의 정치개혁을 촉진해야 한다는 여론도 다분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에서의 경제발전은 197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지속되었고그 영향으로 중산층이 태동하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사회구조에 변화가 뚜렷하게 드러났다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태동인 사회변화가 정치적이 아닌 경제적인 현상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중산층의 형성과 확산은 1980년대에 활발하게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중산층의 태동과 확산은 한국교회 내의 평신도들에게 활발하게 전도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했으며다양한 신앙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2-2. 1970년대의 한국 교회

1970년대는 한국교회 100주년을 앞두고 각 교단이 경쟁적으로 교세 확장 운동을 펼친 시기였고이에 따라 교회 성장이 획기적으로 일어났던 때이기도 했다장로교 합동 측은 1만 교회운동을 전개했으며통합 측은 연 300 교회 개척운동을 펼쳤다또한 감리교와 성결교도 교세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73년 하나님의 선교 원칙을 채택하여 사회구원에 관심을 보였던 장로교 기장 측도 다른 교단들이 교세 확장에 나서자 양적 성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각 교단은 전도와 교세 확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단 조직도 개편했으며교인들에게 전도훈련을 실시하였고부흥전도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

 

이 시기 한국교회의 가장 큰 관심은 양적인 성장이었으며각 개교회지방회나 노회그리고 교단들이 경쟁적으로 다양한 부흥전도집회를 열었다또한 초교파적인 대규모 집회도 서울과 지방에서 개최되곤 했다. 1973년 5월 16일부터 6월 3일까지 지방 주요 도시와 서울에서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주제로 개최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전도대회와 1974년 8월에 열린 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이하 CCC) 주최의 엑스플로 ’74, 그리고 1977년 8월에는 32개 교단이 연합하여 600여 명의 강사를 동원했던 77 민족복음화성회는 각각 참가자가 연인원 수백만 명에 달한 대규모 집회였다. 1980년의 80 세계복음화대회는 한국교회의 성장 속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열린 집회들로서, 1970년대를 거치며 크게 성장한 한국교회의 자신감과 힘이 표출된 인상적인 사건들이었다그 후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1984년의 다양한 군중집회도 이와 같은 대형집회의 전통을 이어가며 한국교회의 성장세를 견인해 갔다.

 

특히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우선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고범 교단적인 조직을 만들며전도훈련을 시키고개 교회에 그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도록 조직화하였다이러한 조직화의 구체적인 열매는 바로 나타났다먼저 이 집회는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으며, 1973년 5월 16일부터 전국의 9개 도시를 순회하며 집회를 열었는데 연인원 120만 명이 동원되었다그리고 5월 30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 5.16 광장(현 여의도 공원)에서 대대적인 집회가 열렸다마지막 날엔 110만 명이 운집했고, 4일동안 연인원 320만 명이 참석하였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세계 교회사에 있어서도 특별한 사건이다.”이 집회야말로 대중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효율적인 광고를 통해 기획되고 조직화된 대중 집회의 효시(嚆矢)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야말로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참여한 대중전도집회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으며,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처음으로 여의도 광장에 모인 대규모 집회였다그래함은 1949년에 열린 로스앤젤레스 전도대회를 통해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졌으며, 1954년 런던 대 전도대회를 통해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그리고 20년이 지난 1974년에 이르게 되면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Losanne Congress on World Evangelism)와 엑스플로 ’74를 통해서 그는 세계 기독교의 대변인”(statesman)이 되었고각 개인들과 운동들을 통합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새로운 길을 잘 닦은 촉매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이렇게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미국의 복음주의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이자 부흥사인 빌리 그래함 목사의 능력 있는 말씀 선포와 한국 교계를 대표해 전체 조직 위원회를 맡아 지도력을 발휘한 한경직 목사미국 CCC 창설자 빌 브라잇(Bill Bright) 총재와 함께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했던 김준곤 목사그리고 통역을 맡아 빌리 그래함 목사와 빌 브라이트 총재의 설교의 영향력을 드높여 준 김장환 목사와 박조준 목사 등의 역할도 1970년대 부흥운동과 대중전도집회의 긍정적인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이렇게 시작된 대중전도운동의 열기는 단회적으로 그치지 않았다.

1974년 김준곤 목사가 CCC를 중심으로 한국교회를 결집하여 추진한 엑스플로 ’74는 빌리 그래함 서울전도대회를 통해 촉발된 부흥의 열기를 더 한층 고조시키고한국교회의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이 연합하여 대중전도운동과 함께 교회성장의 기운을 확실하게 자리 잡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이 집회에 대한 소식은 한국 교계뿐만 아니라일반 언론계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도 했다이렇게 시작된 대중전도집회는 그 이후의 교회부흥을 견인하며 대중전도운동은 한국교회를 근대화시킨 원동력이었고놀라운 교회성장의 촉매 역할을 했으며복음주의운동을 발흥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해외선교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한국 교회사와 세계 교회사에 있어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성공을 거두었고한국 교인들에게 한국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었으며더 이상 한국사회의 변두리가 아니라 주류가 되었다는 의식을 갖게 해 주었다이 집회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일치를 보여 주었고한국인 및 한국 교인들의 저력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일련의 대형집회를 가지면서도 아무런 사고 없이 질서정연하게 치러진 것에 대한 일반 매스컴들의 평가도 매우 긍정적이었다또한 이 집회를 통해 한국 기독교가 공산주의에 맞설만한 반공의 보루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었고북한과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에서 기독교야말로 대한민국의 체제를 수호할 수 있는 주체세력이 될 수 있음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이 집회를 통해서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민주 우방과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세계에 한국 기독교의 저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으며정치적으로 한미관계는 긴장과 위기에 처할 때도 있었지만양국관계가 상당히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무엇보다도 이 대회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회가 기독교 세계의 일원으로 세계 선교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협력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러한 대형집회를 준비하고 이끌어가면서 한국교회는 정부의 협력을 받으면서 비판의 빌미도 제공했지만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반공을 매개로 정부와 서로 협력했다.

 

3. 엑스플로 ’74와 김준곤 목사

김준곤은 1970년대를 맞이하면서무엇보다도 민족복음화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선포하면서 한국의 모든 기독교인 한 사람한 사람이 이러한 시대적 소명을 위해 함께 헌신할 것을 촉구하였다.

저는 한국의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복음화가 앞으로 기어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힘쓸 것을 결심하고 선언합니다. 70년대가 가기 전에 한국의 정치와 한국의 경제와 한국의 교육과 한국의 문화가 입체적으로 복음화하기 위해서 먼저 농촌 마을에 수천 명의 학생 전도대를 훈련시켜 파송할 것입니다.

 

민족복음화를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초고등학교들과 대학들이 복음의 황금어장임을 인식하고 학원복음화를 통해 이러한 사명을 구현해 나가자고 외쳤다: “추수할 곡식이 익어 있습니다.... 한국의 70년대는 그리스도의 시대가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그리고 남북통일도 예수의 혁명으로 이룩하도록 우리는 이 원단에 엄숙하게 결심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원대한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김준곤은 엑스플로 ’74를 개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그는 개회사에서 그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가 여기 모인 단 한 가지 큰 목적이 있습니다그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기에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그 복음을 전할 보다 많은 사람을 보다 효과적으 보다 전략적으로보다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지금은 복음 전도의 최후 최대의 도전적 기회입니다인류 운명의 시간은 묵시론적 종말의 시점에 왔습니 .

 

김준곤은 이 시대에 주어진 복음화라는 과제를 단지 한국 민족만을 전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시대적 광기와 정신적 암흑의 정도가 사상 최악의 상황임을 부각시키면서이것이야말로 복음전도의 도전적 기회로 포착하고 종말론적 차원의 사명임을 힘주어 강조하였다또한 이러한 사명 완수가 교회사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임을 역설했다: “종교개혁의 주제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었다면이번 주제는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이것은 현대의 종교 개혁적 주제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의 명령과 약속 조건만 순종하면 확실히 가능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1907년도에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이 한민족을 중심으로 한 회개운동과 전도운동이었다면, 1974년에 일어난 엑스플로 ’74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오순절이 세계 각국에 복음화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고그 꿈과 기도가 훗날 이렇게 평가받기를 염원했다.

 

이것은 우리의 꿈이고 우리의 기도이기 바란다한국은 제2의 이스라엘이 되었다 울시는 제2의 예루살렘처럼 성시화가 되었다한국에서는 사도행전이 연장되고 있다엑스플로 ’74에 세계 각국과 한국 각처에서 모였던 사람들이 믿음으로 성령에 충만함 을 받아 모든 나라의 문화와 사상과 종교적 장벽을 깨뜨리고 복음의 증인이 되어 일 본과 인도와 공산 진영까지 복음 전도의 불이 퍼져갔다한국은 공산주의를 신앙으로 완전히 극복하였다그 사건은 정신사의 분수령이었다영의 시대를 향한 새 장을 열 었다한국은 세계 사상 전례 없는 최초의 이상적 국가가 되었다미국은 민주주의를 수출하고 일본은 상품을 수출하고 프랑스는 자유를 수출하고 영국은 산업혁명을 일으 켰고 러시아는 공산혁명을 일으켰고 중공은 문화혁명을 일으켰고 서유럽의 사회는 섹 스 혁명을 일으켰는데 한국은 예수혁명성령의 혁명을 일으켰다한강변의 기적은 예수의 기적이었다그들이 민족의 가슴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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