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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파워][정인수 목사]50주년을 맞는 Explo’74와 우리의 사명(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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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CM (1.♡.198.116)
댓글 0건 조회 341회 작성일 24-09-03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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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수 목사]50주년을 맞는 Explo’74와 우리의 사명

정인수 목사(국제CCC 부총재 역임, 원로간사)
 
정인수icon_mail.gif   기사입력 2024/09/01 [16:30]

 50주년을 맞는 Explo’74와 우리의 사명


▲ 엑스플로 '74대회     ©뉴스파워

 

1. 들어가며

 

금년이 Explo’74 50주년(희년)이다. CCC의 Explo’74 세대들은 Explo’74 얘기만 나오면 할 말이 많다. 3년 군대(지금이야 일 년 반이지만) 다녀온 남자들이 모여 군대 얘기만 나오면 끝이 없는데 기적 같은 Explo’74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작년부터 Explo’74 50주년을 앞두고 간사들 수련회와 CCC전국총단 대표들 등으로부터 Explo’74에 대한 강의나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Explo’74를 소개하면 첫 반응은 와-(Wow)하고 입이 벌어진다. 다음으로는 “어떻게 그런 일이?” 하며 질문(믿어지지 않는 상황)이 이어진다. 지금은 훨씬 더 준비되고 1000명 가까운 간사들이 사역하는데 CCC여름수련회에 10,000명이 모이려면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한 이 세대가 50년 전에 30만이상이 합숙훈련을 받고 밤이면 100만 명 이상이 모였다는 것 그 자체가 당연히 놀람과 충격일 수밖에 없다.

 

내가 경험한 Explo’74도 정말 부분적이다. 그 현장에 있었다는 감격, 시골 전남 광양에서 고등학교 교사 2년차로 지방 CCC의 협동간사를 하며 학생과 성도들을 동원하여 서울로 Explo’74에 기차를 대절하여 왔다. 당시 북아현국민학교에서 합숙하며 전남 광양군과 구례군에서 온 630여명을 훈련하는 일을 한 것이 나의 Explo’74 현장 경험이다. 그것도 감격스러웠지만 후에 전임간사가 되고 비서실에서 김준곤 목사님을 보좌하며 사역하면서 Explo’74의 큰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간 내가 알던 Explo’74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이었구나. 라고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후에 있었던 Explo’85를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국제사역에 참여하며 이 Explo’74가 한국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게 되었다.

 

CCC에서 공식적으로 Explo라는 이름을 사용한 행사는 3번이다. 먼저는 미국 댈러스에서 1972년에 모인 Explo’72요, 다음이 Explo’74, 그리고 최초의 위성중계로 세계 92개 도시를 연경하여 동시에 열린 Explo’85다. Explo는 Explosion(폭발)의 약자이다. Explo’74는 이 민족복음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 폭발적인 이정표가 된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과정에 홍해바다를 가르듯이)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Explo’74를 여의도광장에서 1974년에 모인 한 거대한 집회와 일회적인 훈련의 행사가 아니라 민족복음화를 향한 폭발적인 이정표(Milestone)이라고 말하고 싶다. 

 

2. Explo’74란

 

1) Explo’74를 요약 정리하면

 

이 민족의 입체적인 복음화를 위하여(Why)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5박6일 동안(When),

 

여의도 광장과 인근 100여개 학교를 숙소로 하여(Where),

 

김준곤 목사님의 지도하에 전적으로 헌신된 한국CCC와 나사렛형제들이(Who),

 

32만여 명 합숙 전도훈련과, 밤이면 100만 명 이상이 예배하며 복음을 전한(What),

 

성령님 도우심 속에 단계적인 준비로 한국 성도의 1/10을 동원 훈련하며(How)

 

수많은 기적을 체험한 이 민족의 복음화 여정에 폭발적인 이정표라고 정의하고 싶다.

 

2) 등록과 참가자 현황

 

좀 더 구체적으로 상황을 보자. 5박6일의 훈련을 위해 등록한 인원은 323,419명이다(중·고등학생 8만7400명, 대학생 2만5300명, 평신도 19만3200명, 목회자 1만3000명, 교수 500, 의료인 312, 법조인 208, 외국인 3400) 여의도광장에서 모인 저녁집회에는 매일 100만 명 최대 참여자 158만이었다. 참가한 교회는 약 12,000교회였고 저녁 예배에 10,000명 성가대가 찬양했다.

 

3) 숙소와 식사 그리고 개인전도

 

숙소는 여의도 광장 8000개의 천막에 10만 명이 기거했고 20여만 명은 인근 100여 초중 고등학교를 사용했으며 외국인들은 이화여대 기숙사 등을 사용했다. 집회기간에 훈련 받은 대부분이 개인전도를 나가서 42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여 272,000명 결신, 관심자 12만 명, 외국인 1,192명이 결신하였다. 집회기간에 헌금 1억 6687만원(현재의 물가로 환산하면 약 67억 원)이 모아졌고, 식사를 위해 쌀 7,000가마(80kg), 빵 360만개, 부식 150톤이 사용되었고 연 3,400명이 식사봉사에 헌신했다. 

 

3. Explo’74의 특별한 의미

 

1) 세계역사상 최대의 전도훈련, 한국교회에 평신도 시대의 문을 열다

 

밤이면 100만 명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곳에서도 많은 결신자가 나와 의미가 있었지만 세계선교의 역사와 민족복음화의 관점에서 가장 큰 의미는 바로 30만 이상의 성도가 5박6일간 합숙하며 전도 훈련을 받은 것이다. 이는 당시 한국 교인의 1/10이 전국에서 모여온 것이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훈련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평신도 시대의 문을 열린 것이다. Explo’74를 준비할 당시 한국CCC는 70명이 안 되는 전임 간사가 사역하고 있었고 Explo’74를 위해 공채로 간사를 모집하여 300명 이하의 간사가 이 거대한 행사를 감당하며 나사렛형제들은 모두 협동간사처럼 뛰었고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헌신했다. 그리고 훈련 받은 30여만이 전국 교회에 흩어져 불씨가 되었으니 한국교회에 평신도 시대가 열린 것이다.

 

2) 한국교회 부흥의 패러다임 전환과 민족복음화에 폭발적 계기

 

한국교회의 부흥에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부흥사 중심의 부흥 시기였다. 성도들의 전도에 참여는 바로 “우리 교회에 와보라” 는 초청 중심이었다. 특히 부흥회를 중심으로 교회 초청이 이루어졌다. 물론 부흥사분들의 기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평신도들이 불신자를 찾아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새 시대가 열린 것은 한국교회에 위대한 축복이요 부흥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것이다.

 

이렇게 훈련된 성도들이 적극적인 전도의 삶을 살며 한국교회는 200만에서 300만이 되는 데는 10년 이상이 걸렸지만 Explo’74를 계기로 300만에서 400만이 되는 것은 불과 1년(1974∽1975)이었다. 그 후 1,000만성도가 되기까지 부흥이 이어졌다.

 

3) 기도운동과 국가적인 위기 상황

 

새로운 기도운동이 일어났다. Explo’74를 위해 전국적으로 기도하며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대회기간에 밤이면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청야기도에는 평균 10만 명이 참여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이 있었다.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가 발령되었고 국제적으로는 월남의 패망이 가까워 오며 국가 보안에도 위기였다. 또 대회기간 중에 8월 15일 광복절 기념 행사장에서 대통령저격사건이 있었고 대통령은 무사하셨지만 영부인이 현장에서 서거했다. 이런 여건에서 기도는 더욱 뜨겁게 모아졌다. 

 

4. Explo’74와 넘어야 했던 장벽들

 

민족복음화의 여정에 폭발적인 기여를 한 Explo’74는 미국에서 열린 Explo’72에서 최초로 공표되었다. 80,000명이 댈러스 코튼 볼(Cotton Bowl)에서 열린 Explo’72는 미국의 교회사와 CCC역사에 의미 있는 전도훈련이었다. 한국에서 100명의 대표단과 함께 참석한 김준곤 목사님은 대회 마지막 날 단위에 서서 2년 후에 한국에 30만이 모이는 Explo’74가 열릴 것을 예고하고 기도를 부탁하며 초청했다. 당시 한국이 처한 국내외적인 현황이나 CCC상황은 이런 대형집회와 훈련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말 그대로 수많은 장벽이 있었다. 후에 김준곤 목사님은 74개의 골리앗이 있었다고 회고하셨다. 이를 일곱 가지로 요약해 보면

 

1) 동원

 

가장 큰 장벽은 30만 명의 등록이다. 이는 한국 전 성도의 1/10로 매우 의미 있는 숫자이지만 과연 전국 각지에서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것도 아닌데 30만 명이 합숙훈련을 받기 위해 등록할 것인가? 저녁 집회에 100만 명 모이는 것도 어마어마한 도전이지만 이미 73년 빌리그래함 전도 대회에서 여의도에 100만 명이 모인 적이 있었다.

 

2) 합숙

 

등록한다 할지라도 이 30만 명의 숙식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 대한민국 국군이 60만인데 그 반이니 이를 상상해보라. 김준곤 목사님도 대회를 준비하며 군인이 역시 합숙하며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사단장을 찾아서 숙소와 식사 해결을 위해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잘 훈련된 군대도 사단보다 적은 단위로 동시 합숙하며 하는 훈련하는데, 훈련되지 않은 전국에서 모인 남녀노소를 그것도 한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군대의 반에 해당하는 30만을 모아 합숙훈련,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 죽어 나갑니다.” 합리적인 이 설명이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3) 교육

 

사람이 모아지고 합숙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과연 어떻게 이 30만 명을 교육 훈련할 수 있을 것인가? 30만 교육을 위해서는 적어도 10,000명의 훈련된 순장(한 순장이 30명을 훈련한다 할지라도)이 필요하며 그 장소와 교육환경 등 적적한 교육훈련을 어떻게 시행할 것인가?

 

4) 안전

 

8월 한 더위의 아스팔트 여의도광장에서 또 인근 숙소에서 30만 명이 숙식하며 움직이고, 밤이면 100만 명이 모이는 이 과정에 수반될 수 있는 모든 안전 문제이다. 여름 음식은 상하기 쉬운데 식중독 문제, 폭염과 폭우, 전국에서 오는 분들의 교통과 안전 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5) 재정

 

이 거대한 행사를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했다. 지난겨울 대학생 3일간의 금식수련회 등록비가 식사를 안 하는 데도 80,000원 이상이었다. 요즘 물가로 한다면 5박 6일의 이 훈련을 위해서 적어도 20만원의 동록비가 실비일 것이다. 32만이면 640억이고 다른 준비 등을 고려한다면 지금이라면 적어도 800억의 예산으로도 힘들 것 같다.(한국CCC의 대집회를 운영한 경험과 국제CCC Global Operation담당 부총재 경험을 토대로)

 

6) 정부의 허가

 

이러한 대형 집회는 당연히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Explo’74 전에 대통령 긴급조치가 내려지고 월남에서 미군이 철수해가고 월남이 패망을 눈 앞에 두고 한반도의 위기도 고조되고 있는 등 국내외 정세가 어려운 때다. 주변의 모든 학교까지 다 개방하며 사용할 수 있도록 협조가 필요한 이 행사를 과연 정부가 허락할 것인가

 

7) 강사

 

특히 저녁 집회는 성도들에게 강사는 매우 중요했다. 감사하게도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대회에 오셨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Explo’74의 국제명예대회장을 맡아 주었고 강사로 오시겠다고 약속했다. 저녁 전체 집회에 100만 명이 모이는데 세계적으로 지명도를 가진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오시는 것은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6개월을 앞두고 강사로 올 수 없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후에 김준곤 목사님도 그 통보를 받았을 때 며칠간 매우 힘들었는데 기도 중에 하나님이 물으시기를 “너 빌리 그래함 믿고 이 Explo’74를 준비하느냐, 아니면 나를 믿고 하느냐?” 그래서 주님 앞에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다고 간증하셨다. 

 

5. 무엇이 이 모든 장벽을 넘어 가능하게 했는가?

 

1) 비전과 믿음이다.

 

김준곤 목사님 안에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CCC와 나사렛 안에 민족복음화의 꿈이 잉태되었다. 1970년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며 71년이 밝아오는 시점에 CBS의 전파를 타고 김목사님은 민족복음화운동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의 김준곤 목사님의 설교는 민족복음화를 주제로 학생들과 나사렛 전국의 민족복음화 요원들에게 선포되었다.

 

2) 비전 있는 탁월한 지도력

 

국내에서 민족복음화 운동의 공식적인 선언과 준비 그리고 국제적으로 Explo’74가 선언되고 난 이후 실제적인 준비 앞에서 수많은 장벽이 있었다. 일차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CCC간사들은 이 위대한 꿈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할 때 불평이 아닌 불가능함을 진지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준곤 목사님은 세 개의 질문으로 이 장벽을 뚫고 나가셨다. 간사들에게 무엇 때문에 불가능한가를 조목조목 말하게 하고 이를 써서 수련회장소 벽에다 붙였다. 실제적인 장벽(이 장벽들을 골리앗이라 불렀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서 다음 질문이 있었다.

 

(1)우리 민족이 복음화 되어 앞으로 세계선교에 기여하는 제사장 민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인가? 아멘으로 간사들이 화답한다.

 

(2) 이를 위해 전 성도의 1/10인 30만을 모아 전도훈련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인가? 그간 민족복음화를 함께 외쳐온 간사들이 역시 아멘으로 화답했다

 

(3) 만일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면 하나님은 이것이 가능한가?” 요일 5:14-15은“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여기에는 잠시 침묵이 있었고 아멘이 나왔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간사들을 세우니 모든 불가능이라 여겼던 골리앗들이 모두의 기도제목으로 바뀌었다.

 

3) 기도의 힘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불가능하게 여기던 점들이 기도의 제목으로 바뀌게 되며 기도는 더욱 뜨겁게 모아졌다. 한국전쟁 때 동족이 서로를 그토록 무참히 죽이고 보복하는 것을 보고 이 민족의 죄악 상 앞에 비장한 기도를 시작하셨던 김준곤 목사님은 그 후 평생 아침 금식을 하시며 기도하셨는데 Explo’74를 간사들 나사렛들과 함께 기도로 준비하셨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민족복음화요원들과 한국교회의 기도하는 분들이 함께 뜨거운 기도의 불을 지폈다.

 

그중 생각하면 가슴이 찡한 한 권사님이 있다. Explo’74기간 여의도 광장에 매일 철야기도를 하셨다. 비가 내린 날도, 그리고 마지막 18일 밤도 권사님은 철야기도를 했다. 새벽에 이슬이 내려 신문지를 뒤집어쓰고 늦게까지 기도하는 중 소천했다. 집회로 인해 여의도광장에 모아놓은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차가 권사님을 보지 못하고 친 것이다. Explo’74가 은혜롭게 끝나는 날밤에 여의도광장에서 사망 사고가 난 것이다. 당시 비판적인 언론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사거리가 없었다. 권사님 소천 소식을 듣고 광명에 살던 가족이 왔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아팠지만 가족을 대표하는 아드님이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가 이렇게 소천하셔서 마음이 아프지만 하나님은 어머니 평생의 기도제목을 들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하다가 하나님 품에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그 권사님의 손녀가 후에 CCC간사로 헌신했는데 백OO 간사이다.

 

4) 영적 운동이다.

 

성경에 영적운동(Spiritual Movement)라는 단어는 없지만 특히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영적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고 교회사에서도 수많은 영적운동이 일어났다. 이 영적운동을 어떻게 정의하며 그 근본요소가 무엇인가를 CCC지도자들이 모여 성경 속에서 또 교회사에서 일어난 영적운동을 깊이 있게 살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적운동이 일어나려면 4가지 요소(4 Characteristics of the Spiritual Movements)가 필수적임을 알게 되었다.

 

(1) 잃은 영혼의 구원에 대한 열정(Passion for the Lost)

 

(2) 말씀 안에서 변화된 제자들의 삶(Life Changing Discipleship)

 

(3) 제자 낳는 제자들을 세움(Multiplying Leaders)

 

(4) 재정을 포함한 자체적인 자원의 조달(Sustainable Resources)

 

Explo’74에서 우리는 민족복음화의 비전은 잃어버린 우리 민족 구원의 열정이었고, CCC학생과 나사렛은 물론 민족복음화 요원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와 그가 속한 사회에서 변화된 증인이 되었으며, 이 훈련은 들풀처럼 번져서 Explo’74 이전에 전국의 대부분의 시, 군. 면 단위까지 확산되는 승법번식이 이루어졌고, 이 모든 훈련이 대부분 자비로 헌신하는 가운데 이루어졌고, Explo’74 대회의 준비와 진행에도 80% 이상의 재정이 국내 헌금과 등록금으로 이루어졌으니 폭발적인 그러면서도 지속가능한 영적운동의 대표적인 실례가 된 것이다.

 

5) 단계적인 준비

 

Explo’74는 주님이 주신 특별한 비전으로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그 준비와 진행에는 단계적인 준비가 있었다. 민족복음화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의 캠퍼스복음화는 내일의 민족복음화라는 구호로 이어졌고 이를 위한 순론이 나오고 CCC를 졸업한 형제들이 CCC학사회에서 나사렛형제들이라는 새로운 꿈을 가진 단체로 발족되었다.(1968년 8월)

 

핵심훈련인 민족복음화 요원 훈련(LTC)이 1970년에 최초로 번역되어 시범 훈련을 거친 다음 바로 12월 31일 서울농대 수원캠퍼스에서 전국에서 모인 440명이 최초의 전국단위 훈련을 받고 이들이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이 훈련은 들풀처럼 번져서 대학 캠퍼스는 물론 전국의 모든 시군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훈련이 이루어졌다.

 

1071년 8월(2일-6일) 5일간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전국에서 온 10,000명 단위 최초의 초대형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는 한국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최초로 만 명 단위의 훈련으로 집회 첫날밤에 김준곤 목사님 한국의 이 소식을 빌 브라잇 박사에게 전했다. 이는 바로 다음해 Explo’72를 준비하는 미국에도 큰 격려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72년에 춘천에서 춘천성시화 운동으로 이어져 전국단위 훈련이 계속되었다. 같은 해 미국 댈러스 Explo’72에서 Explo’74가 공식적으로 선포된다.

 

Explo’74의 실제적인 교육을 맡을 그리고 각 지역에서 동원을 포함한 핵심적인 역할을 할 민족복음화요원 순장훈련(당시 사랑방성서학교 훈련이라는 이름을 사용함)이 서울 정동 CCC채플과 미완성된 정동빌딩 6층∽13층을 숙소로 만들어 이루어졌다. 1973년 1월, 2월에 계속 이어진 이 훈련에는 매회 700명에서 1000명이 모여 한 주간씩 집중 훈련이 이루어졌다.

 

1973년에 있었던 최초로 100만 명이 모인 빌리그래함 전도대회(‘73 Billy Graham Seoul Crusade)는 CCC가 주최한 대회는 아니었지만 Explo’74 직전 해에 있었던 초대형 전도집회로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이 대회의 대회장은 한경직 목사님이었고 한국교회가 연합으로 이 대회를 준비하며 김준곤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을 도와 전체 기획에 깊이 참여했다. 그리고 빌리그래함 전도대회는 전도 초청을 하고 영접하면, 이 새 신자를 상담하는 요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73년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상담요원은 많은 수가 민족복음화요원 훈련을 받은 분 들이었다.

 

당시 CCC전임간사는 70명이 채 되지 않았고 공채로 모집한 인력을 더하여 약 300명, 여기에 헌신된 나사렛형제들과 CCC 학생들, 이미 훈련된 민족복음화 요원 이들의 절대헌신이 있었기에 Explo’74의 꿈은 위대한 현실이 되었다.

 

6. 한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미친 영향

 

Explo’74에 32만 등록자 중에 3,400명이 외국인이었다. 의미 있는 1%가 외국에서 온 것이다. 이분들의 참여하여 훈련받고 돌아가 각 나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국제CCC의 역사에 Explo’74는 소중한 기록이요, 영적 이정표로 남아 있다. 이것을 기억하고 당시 역적 감격을 기념하기 위해서 국제본부는 16mm 다큐멘터리 영화가 “Where the life is going?”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Explo’74를 계기로 김준곤 목사님의 생애를 영화화 한 것으로 Explo’74의 현장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Explo’74에 참석차 한국에 온 한 청년이 도전을 받는다. 캠퍼스 사역에 대학생초청 전도행사인 “College Life”에서 가장 많이 상영된 영화이다. 또 장기간 CCC국제본부를 방문하는 자에게 CCC를 소개하는 데에도 이 영화의 일부가 상영되었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청년은 지금 동남아시아 특히 필리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 CCF(Christ‘s Commission Fellowship)의 담임목사인 Dr. Peter Tan-Chi이다.

 

CCC 많은 나라 지도자들은 Explo’74의 현장에서 받은 감격에서 자기 나라의 복음화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아는 두 분의 얘기만 소개한다.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으로 유명한 새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를 세우고 담임 했던 릭 워란(Rick Warren) 목사도 개인적으로 Explo’74에 대한 경험을 말한 바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젊은 선교사로 일본에 왔던 그는 선교지 일본에서 영적으로 많이 힘들어 고민하는 가운데 한국의 Explo’74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의도 광장에 모인 성도들과 훈련받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고 그때 본인이 찍었던 사진을 새들백 교회 집무실에 두고 늘 기억한다고 했다.

 

한 사례를 더 소개하면 싱가포르의 Chan Hong Hiok이다. CCC에서 훈련을 받았던 그는 당시 육군 장교로 근무하다 휴가를 얻어 Explo’74에 참석하였다. 하나님의 역사에 감격하고 결단 돌아가서 바로 예편하여 CCC간사를 지원했다. 후에 싱가포르CCC 국가 대표를 엮임하고, 중국CCC 대표와 CCC동아시아 책임자를 한 후 지금은 EAST 신학교(East Saia School of Theology) 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이렇게 Explo’74는 한국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수많은 지도자들의 삶에 비전을 주고 헌신과 결단의 계기를 만들었다.

 

7. 50주년을 맞는 우리의 사명

 

이제 우리는 Explo’74의 50주년을 맞는다. 그 현장에서 경험했던 세대들이 이제 70대 그 이상이 되었다. 나는 오늘의 우리에게 50주년을 맞아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신명기를 읽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보내고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신명기의 중요한 단어는 “기억하라(Remember)”이다. 신명기에서 “기억하라”는 단순히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회고하며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가 하실 일을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

 

1) 신명기에서 모세의 세 메시지

 

먼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신1“1-4:43)이요 다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기대하시는 일을 아는 것이다,(신4:44-26:19)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신27:1-34:12)

 

2) 우리 앞에 주어진 민족복음화의 꿈과 세계선교 앞에서

 

신 6:23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말씀에서 인도하여 내시는 하나님(His Power),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His Grace),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His Faithfulness)을 본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CCC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행하신 역사와, 우리 민족에게 베푸신 은혜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50주년을 맞는 2024년, Explo’74 그 현장에 있던 세대의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다. 먼저는 그날의 감격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다시 기억하며, 기억을 넘어 새롭게 갈렙처럼 다시 일어설 때라고 믿는다. 그리고 Explo’74를 경험하지 못한 후대에게 CCC안에, 나사렛형제들 안에 흐르는 우리의 영적 DNA가 무엇인지를 전승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나 때에는” 식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혈관 속에 흐르는 DNA를 꿈이 있고 헌신된 우리의 삶을 통해 전수할 때다.

 

▲ 정인수 목사    ©뉴스파워 

*정인수 목사는 1969년 4월 5일 CCC 회원이 되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공주CCC에서 자랐다. 1973년부터 나사렛형제로, 1981년 3월 전임간사로 헌신하여 42년 사역했다. 한국CCC에서 비서실, 기획실, 총무, 부대표로 섬기며 Explo’85 준비와 진행, 1990년 마닐라선교대회와 1995년 GECOWE‘95 대회 등의 실무를 맡아 섬겼다. 후에 CCC동아시본부 대표와 동아시아신학교 총장, 국제본부 부총재를 역임한 후 북한CCC를 세워 섬긴 후 전임간사 은퇴하고 2023년부터 CCC원로간사로 섬기고 있다. 이 원고는 1월 20일 모인 나사렛형제들 신년하례회에서 Power Point로 나눈 내용을 보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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