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파워][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이건오 박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복음의 열정(202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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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이건오 박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복음의 열정 | ||||
이건오 박사- 평택 참좋은친구 박애병원 의료원장, 세계성시화운동본부 공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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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CCC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1 958년 한국CCC 설립하고 대학생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 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 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제가 김준곤 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부산CCC에서 학생 활동을 하면서 부산 대학생 전도 집회를 했을 때였습니다. 그 후 일부러 김 목사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상경해서 묵정동 회관에 와서 말씀을 들었고 나사렛형제들이 되고 서울에서 아가페 운동을 하면서 더욱 가까이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문학적 바탕위에서 인간실존의 원천적인 문제를 도출해 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갈증을 해갈하고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명쾌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외우고 싶은 시구를 목사님은 언제나 감격적으로 외우고 계셨습니다. 또한 소설의 문단들을 거침없이 외우시며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우리 속에 내장된 인생의 원천적 질문을 솟구쳐 내게 하셨고 그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고민할 때 성경 구절들을 암송하여 꺼내서 정확한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내가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왜 여기 있는지, 왜 사는지 등의 다양한 질문들을 신들린 사람처럼 풀어내셨습니다.
당시 제가 의과대학생으로서 부산CCC 학생회 회장을 맡고 캠퍼스를 누비고 다니며 각 단과대학별 대표순장을 만들어 임명하고 대학 복음화를 외치며 다닐 때 목사님께서 저를 학생 간사로 임명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간사님들의 수가 적어서 각 도시마다 한분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그것이 다른 지구에는 없는 제도였고 목사님께서 즉석에서 만드신 제도인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Win the Campus Today, Win the World Tomorrow.”라는 슬로건은 우리들을 미치게 했습니다. 거기에 목사님께서는 불에 기름을 붓듯 감동적인 말씀으로 우리 학생들의 마음속에 복음화의 불을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세상을 모르는 채 열심만으로 뛰던 우리들에게 민족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심으셨습니다. 우리의 눈은 민족을 바라보게 되었고 우리의 가슴은 민족을 품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입체적 구원”이라는 새로운 도전적 개념을듣고 의료를 통한 민족의 입체적 구원에 대하여 목사님과 깊은 대회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기도의 응답
1970년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한국 최초로 일만 명이 모이는 집회를 진행했습니다. 저는 다른 간사님들과 함께 의료와 취사를 담당했습니다. 의료는 진료소를 만들면 되는데 취사장을 만드는 문제는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근처의 군 예비 사단을 찾아가서 취사할 솥을 빌릴 수 있을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군의 담당자는 군 인 만 명을 먹이는데도 엄청난 시설과 사람이 필요한데 민간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간사님들이 목사님을 만나서 어렵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기도하고 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간사님들이 신탄진에 있는 무쇠 솥 공장에 가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솥과 기구를 찾아내어 그 집회를 진행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우리들에게 시켜 놓고는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는 이런 것이 기도의 응답인가의심도 했지만 그때 배운 기도의 응답을 지금도 믿고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다.
엑스플로'74는 한국 교회를 바꾸는 하나님의 성회였습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목사님과 간사님들이 총동원되어 설명회 내지는 민족복음화요원훈련을 위하여 전국 읍․면․시를 돌아 다녔습니다. 여의도에서 일백만 명이 모이는 집회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형제들과 간사님들은 열심히 준비했지만 돌아앉아서는 ‘“김준곤 목사님은 돈키호테시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제가 군의관으로 포항 해병대 사단에 근무할 때였습니다. 김 목사님께서 경주와 포항 지역 설명회를 위해 오셨습니다. 저녁 집회에서 뵌 김 목사님은 기력이 다 쇠잔해지신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몇 도시를 돌아오는 동안에 배탈이 나서 계속 설사를 하면서 집회를 계속하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군 병원으로 달려가서 몇 가지 약과 주사를 챙겨서 목사님께 와서 투약과 주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일정이 아직도 일주일 더 남아 있었습니다. 대구와 고령과 거창, 마산, 창원을 거쳐서 부산까지 가는 일정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군인인 저에게 그 일정이 끝나도록 동행할 수 있겠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군인이지만 그때는 밤 열 시였기 때문에 군에는 보고도 하지 못하고 무작정 목사님 차에 합승하여 따라나섰습니다. 약을 잡수셨기 때문에 설사는 멎었지만 우리들의 차가 고령에 이르렀을 때 이미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령에서 제일 큰불고기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음식도 먹고 잠도 잘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식사는 너무 늦어서 안 되고 식탁을 밀어 놓고 거기서 잠을 잤습니다. 어쩌면 설사 때문에 금식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는데 목사님의 상태는 매우 호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창, 마산, 창원에서 집회를 마쳤습니다. 집회 후, 부산 해운대 극동호텔에 들어 왔을 때는 주일 밤 12시였습니다. 목사님은 옆방에서 주무시게 하고 우리들은 다른 방에서 잠을 자기로 하였습니다. 방에 들어와서 기도를 하고 자자고 해서 간사님 한 분이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뻗겠나이다.” 이렇게 마지막 기도를 하고 모두는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군인이었습니다. 일주일간을 무단이탈한 것입니다. 월요일 새벽에 부대로 전회를 걸었더니 선임상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며 탈영으로 알고 부대가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날 아침에 마침 부대장 이․취임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잠자는 틈을 빠져 나와 포항에 도착하니 겨우 그 시간에 맞춰 왔습니다. 다른 참모들은 저를 툭툭 치면서 “해병대가 어떤 곳인 줄을 아는가? 탈영은 영창이다.'”라고 말해서 매우 긴장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대장은 저에 대하여 아무말도하지 않았고. 새로 부임한 부대장은 모르고 오히려 군의관인 저에게 자기의 질병을 잘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다른 참모들이 “군의관은 하나님이 살렸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군인이 탈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다는 것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의료 선교의 불을 지피다
제가 1976넌 대학원 논문 때문에 서울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엑스플로'74때의 일로 의료봉사단체인 MS가 CCC를 떠나가 버렸기 때문에 CCC 안에 의료인들의 모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의 학생들을 모아서 성경 공부를 하고 신창동 진료소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모임이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아가페 입니다. 목사님께서는 민족의 입체적 구원의 일환으로 의료를 통한 전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간사님들을 보내 주셔서 아가페가 성숙해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께서 신창동 진료소를 매각한다는 소식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그 진료소는 기증받아서 지은 것이고 그곳에 아가페 병원을 세울 계획을 하고 꿈이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목사님을 만나 뵙고 진위를 파악하려고 했는데 목사님께서 우리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부암동훈련원을 건축하는데 생각 밖의 재정이 필요하여 신창동 진료소를 매각하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너무도 화가 나서 목사님에게 거칠게 대들었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결국 그 건물은 팔렸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그렇게 거칠게 목사님을 대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때는 우리 젊은이들의 생각이 가장 의롭고 올바르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한국대학생선교회 전체를 이끌어 가시는 목사님이 재정으로 인해 시달리시는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목사님께서는 의료를 통한 복음 전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의료 선교의 도전과 개념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선교의 열기가 일지 않았던 때이라 선교라는 자체가 낯설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CCC 안에서 의료선교대회를 열게 하셨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지금의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에서 시행하는 ‘의료선교대회’ 가 전국적인 규모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대회로 인해 의료 선교의 도전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제1회 의료선교대회의 대회장을 김 목사님께서 맡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CCC가 한국 의료 선교의 불을 지폈고 또한 선봉적 역할을 했습니다.
김 목사님께서 한국 아가페 의료선교팀을 파키스탄으로 파송하도록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파키스탄 라호르에 있는 지완 주교와 협의를 거쳐서 우리 팀을 파키스탄 라호르의 근처 도시인 사카에 있는 “자나나 병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하 나님은 처음 기도했던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카라치 근교의 오랑기타운에 있는 지금의 선한사마리아병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병원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의료인들이 함께 팀 사역을 하는 최초의 한국 선교병원입니다.
국내에 있는 의료 전도 활동도 목사님께서는 매우 감격해 하셨습니다. 일본의 하천풍헌이나 한국의 장기려 박사님처럼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와 전도를 민족의 입체적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강조하시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민족 복음화의 완성은 우리 제자들의 몫
김 목사님은 참 좋은 아버지셨습니다. 목사님의 따님이 암으로 수술을 받고 투병을 할 때 제가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따님을 향한 목사님의사랑은 대단하셨습니다. 무엇이나 내 몸의 무엇을 떼내어주더라도 살릴 수 없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기도와 눈물로 병상을 지키셨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분으로만 보였던 목사님의 눈에 나약한 눈물이 수없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아버지의 모습이고, 아버지의 눈물과 고뇌구나’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장례 후에도 따님을 그리워하며 때때로 말씀도 하시고 글로도 쓰시며 그 마음에 담은 사랑을 계속 표현하셨습니다. 큰 인물은 큰일이나 작은 일 하나하나에도 깊은 사랑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삶의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독인들이 정치에 적극적 참여함으로써 복음이 사회를 지배하는 환경을 만드시려고 노력하셨지만 참으로 많은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 중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반대하기도 하여 섭섭함도 크셨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어른이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이 남았을까 라고 범인들은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먹고 살아오신 분은 어쩔 수 없는 삶을 사십니다. 나이가 무슨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그때 포항에서 성시화운동세계대회가 열렸습니다. 성시화 운동은 김 목사님께서 주창하신 우리 나사렛형제들의 민족 복음화의 비전입니다. 목사님께 강의를 부탁드렸습니다. 목사님께서는 1970년대의 춘천 성시화 운동의 비망록들을 모두 꺼내서 책을 만드시고 그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비전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하여 정말 열심히 준비하시고 강의해 주셨습니다. 팔순이 넘으선 연세에 어디서 저런 열정이 남아 있었는지 사람들은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비전이 보일 때 기력을 새롭게 되살려내셨습니다. 꿈은 나이에 관계가 없고 비전의 성취는 체력에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성령의 힘이 꿈과 비전을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목사님의 생전에 이 땅에 성시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그렇게도 기도했던 이 민족의 복음화가 완성되게 하는 일은 우리 제자들의 몫으로 남아있습니다.
김 목사님의 삶을 누가 흉내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의 몫으로 주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만 목사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선 그 꿈과 비전은 주님 오시는 날 까지 이루도록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건오 박사는 1968년 부산대 의과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가톨릭대 의과대학 대학원 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외과학)했다. 부산침례병원 고신의료원 및 해군 군의관, 서안복음병원 외과장 및 원장, 한동대학교 부설 포항선린병원장(한동대 선린병원장), 인산의료재단 선린의료원 원장,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회장, 북한 의료선교위원회 위원장, 고신대 의과대학 교수(외래) 등을 역임했다. 현재 평택 참좋은친구 박애병원 의료원장으로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아가페의료봉사단 고문, (전)국제 기아대책기구 이사, 동시에 그가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자 멘토, 영적인 아버지이셨던 성산 장기려 선생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및 성산 생명윤리연구소 이사, 세계성시화운동본부 공동상임회장을 지냈다. 이른 나이인 3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서울시민교회 장로로 섬기며 실천적 그리스도인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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