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파워][이상규 교수]엑스플로 '74와 민족복음화운동(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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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면서 1970년대 한국교회는 활력과 변화, 부흥과 성장의 시기였다. 이런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간 중요한 동인은 1970년대의 대형 전도집회였다고 할 수 있다.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1974년의 엑스플로74(Explo74), 1977년의 민족복음화대성회, 1980년 세계복음화 대성회 등이 그것이다. 이런 대형 집회 기간, 일일집회에서 100만여 명 이상이 참석하고, 집회기간 연인원 500-600만 명이 참가한 일은, 설사 이 통계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을 고려한다할지라도, 교회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1세기 당시 전도자 바울이 이동한 거리는 약 2만 km에 달하는데,이는 지구의 둘레의 절반 거리로서 그 시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원(遠)거리였고 장(長)거리였고, 그 이후에도 바울만큼 먼 거리를 여행한 이들이 많지 않다. 1970년대 한국에서 단일 집회에 1백만 명 이상이 회집했다는 사실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초대형 집회였고, 이런 집단 회집은 앞으로는 상상하거나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970년대 한국교회는 여러 부정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생명력(fertility)과 활력(dynamics),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교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의 대형 집회 가운데서 엑스폴로74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집회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민족복음화’라는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시작되었고, 이 집회를 위해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준비와 훈련을 거쳐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일회성 집단 회집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복음화’라는 용어는 김준곤 목사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서, 그는 ‘민족’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인종적 종족주의를 의미하기 보다는 국가적 개념으로 보아 한국복음화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우선 남한을 그리고 종국에는 북한까지 기독교 신앙으로 통일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표현은 달리했을지라도 민족 복음화를 위한 이전의 시도에 대해 정리한 후, 엑스폴로74의 개최에 대해 기술하고, 엑스폴로74가 갖는 (신학적) 의의에 대해 필자의 관견(管見)을 정리해 둠으로서 ‘엑스폴로74’ 50주년을 기념하고자 한다.
1. 한국교회의 민족복음화운동 한국교회는 1900년대부터 비록 이름은 달리했지만 ‘민족복음화’를 의도하고 대중 전도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 첫 번의 경험이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이었다.
1) 해방 이전의 전도운동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을 경험한 이후 1909년에는 ‘백만인구령운동’(A Million Souls for Christ)을 전개한 바 있고, 1915년 박람회 기간에 전국적인 전도운동을 실시한 바 있다. 백만인구령운동이란 1909년 9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한국 기독교계에서 100만 명 신자를 확보해 보자는 의도로 전국적으로 전개한 초교파적 전도운동이었다. 1903년 원산부흥과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이후 헤이해진 현실에 대한 타계책으로 추진되어 백만 구령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대중전도의 주요성을 인식시켜 주었다. 이 전도운동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사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제는 조선 병탄 5년째인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서울의 경복궁 일대에서 전국의 물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대대적인 ‘조선물산공진회’(박람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의 진보와 발전을 한국인에게 전시하려는 의도로 시정(施政) 5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이 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이 때 농민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관람하게 했는데, 약 216만 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이 박람회 기간을 이용하여 전국적인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박람회장 근처에 대형 천막을 설치하고 박람회에 오는 관람객들에게 박람회 기간 전후 50일 간 복음을 전했다. 이때 10만 명의 사람들이 천막으로 찾아왔는데 이중 1만1천 명이 복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며 이름과 주소를 남겨두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20년에는 한국교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전도운동을 실시한 바 있다. 장로교회는 이를 ‘진흥운동’(the Forward Movement)이라고 불렀고, 감리교회는 ‘백년 전진’(the Centenary Advance)이라고 불렀다. 장로교회의 전도운동을 주도한 이는 길선주와 김익두 목사였다.이 운동의 결과로 1920년 장로회는 5,603명의 새신자를 얻었고, 장,감의 주일학교 학생 수가 1만 명에서 1만4천 명으로 늘어났다. 1895년 이후 1910년 이전까지는 교회가 급성장하였으나 1910년 이후 교회가 완만한 성장을 보이거나 마이너스 성장을 보여주었는데, 1917-1919년에는 신자수가 많이 줄었다. 그러다가 1920년부터 24년까지는 교인수가 다시금 급성장하였다. 이것은 3,1운동 이후 교회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탓이기도 하지만 진흥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부터 3년간 다시 전도운동을 실시한 바 있다. 장로교 총회가 3년일정 전도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이때의 전도운동은 첫해에는 성경공부에 치중한다. 둘째 해에는 성경말씀 공급에 주력한다. 셋째 해에는 교회에서 이탈한 이들을 다시 교회로 인도하는 일에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이 전도운동 기간 동안 『예수의 생애』라는 소책자 140만부를 배포하였다.그 결과 다시 교인수가 증가하였다. 알렌 내한 50주년이 되는 1934년 당시 교회수는 4,949개, 신자수는 307,403명이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활동이 민족복음화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다시 민족복음화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그 첫 번째 경우가 김치선 박사의 ‘3백만구령운동’이었다.
2) 김치선과 3백만부흥운동 해방 이후 민족복음화운동의 선구적 인물은 김치선(金致善, 1899-1968) 박사였다. 1899년 함경남도 함흥군 흥남읍(興南邑) 서호리(西湖里) 어촌에서 출생한 김치선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던 중 훈장 김응보 영수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캐나다장로교 영재형(Luther L. Young) 선교사의 배려로 함흥의 영생(永生)중학교,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간 수학하고 영재형 선교사의 인도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6년 9월 고배중앙신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이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김치선은 영재형과 함께 일본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한국인들에게 전도했는데, 당시 일본에는 40만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1930년(소화 6년) 3월 24일 고베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를 졸업한 김치선은 재일(在日)조선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다시 영재형의 주선으로 1931년 9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는 이 학교에 입학한 첫 번 째 한국인이었다. 이 학교에서 신학석사(ThM) 학위에 준하는 과정을 이수한 이후 달라스의 복음주의신학교(Evangelical Theological College, 후일 달라스신학교로 개칭된다)로 옮겨 가 구약학을 전공하고 1936년 5월 12일, “오경의 모세 저작권 연구 The 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영재형 선교사와 60여개 처에 달하는 재일한인교회를 도왔고, 후에는 고베(神戶)중앙교회, 동경의 신주꾸(新宿)중앙교회에서 사역하던 중 니시노미아(三宮)교회, 효오고(兵庫)교회, 아가이시(明石)교회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영재형 선교사가 캐나다로 귀국하게 되자 김치선 목사도 귀국하였고, 1944년 5월 서울남대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때부터 1950년 6월까지 6년간 이 교회를 담임하게 되는데, 이 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3백만 구령운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사실상 해방 후 최초의 민족복음화운동이었다.
김치선은 해방된 조국에서 영적 각성과 부흥이 필요하다고 보아 ‘3백만 부흥전도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부흥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당시 한국인구 3천만 명의 십일조인 300백만 명을 구원한다는 취지로 ‘3백만 부흥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위해 개인전도, 특별 집회, 부흥회, 라디오 방송, 기관지 발행 등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했다. 또 남대문교회 내에 야간 신학교를 설립하고, 1947년 6월에는 <부흥>이라는 기관지를 창간했다. 또 이때부터 전국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2만 8천개의 우물을 파야 한다며 전도운동을 전개했다. 2천8백이라는 수는 당시 행정구역상 2천8개의 리(里)를 기준한 것이다. 이 일에 동조하고 전도운동에 동참했던 이들이 강준의, 박재봉, 손양원, 이성봉, 이의완 목사 등이었다.
해방 후 한국교회에서, 한상동 목사는 회개운동을 통한 교회쇄신을 제창했다면, 한경직은 복음과 함께 구제와 복지를 제창했고, 김치선은 전도 혹은 구령운동을 통해 민족복음화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 민족복음화운동은 1950년 초까지 계속 추진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사실상 중단된다. 이 때의 부흥운동 결과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으나 해방 이후의 최초의 거국적인 민족복음화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 1950년대의 전도운동 1950년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는 전도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복음화를 시도한 바 있다. 장로교회는 6.25 전쟁의 와중에서도 1952년을 심령부흥의 해로 정하고 개인전도와 단체 전도를 강조하였고, 같은 해 성결교회도 그러하였다. 감리교회는 존 웨슬리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1953년 특별 전도대회를 개최했다. 1954년에는 장,감 합동으로 선교70주년 기념사업으로 장로교회는 무교회지역 490곳에 교회를 세우기로, 감리교는 100개 교회를 개척하기로 그대로 실행하였다.
1955년에는 밥 피얼스가 내한하여 여러 도시를 순방하며 전도집회를 개최하여 약 2만 명의 결신자를 얻었고, 빌리 그래함은 1952년 12월과 1956년 2월 두 차례 내한했는데, 1952년 12월 15일에는 부산에서, 1956년 2월 26일에는 서울에서 각각 전도 집회를 개최하였다.
4) 1960년대의 전도운동 1960년대에도 민족복음화에 대한 이상을 잃지 않았고 선교 80주년이 되는 1965년을 복음화운동의 해로 정하고 초교파적인 조직을 갖추고 전도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김활란 여사였다. 1964년 10월 16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75인의 교계인사들이 모여 남미에서 전개되는 복음화운동에 대한 보고를 듣고 한국에서도 이런 복음화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는 개신교만이 아니라 천주교도 동참한 일은 특별한 경우였다.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전국 주요도시 4만개의 부락에 복음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이 복음화 운동은 다섯 가지 목표를 제시했는데, 1. 삼천만 모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한다. 2. 삼천만 모두가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갖게 한다. 3. 전국 주요도시와 4만여 부락에 복음이 전파되게 한다. 4. 재일교포와 북한 동포들에게도 복음을 전한다. 5. 신자는 각각 배가운동을 한다.
준비위원회는 수차례의 모임을 가지고 각 교단 대표 300여명으로 구성된 복음화운동 전국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은 천주교회 35명, 장로교의 통합, 합동, 기장측이 각각 30명, 고신측 10명, 성경장로교 5명, 감리고 32명, 구세군 15명, 기독교성결교 5명, 성공회 8명, 정교회 5명, 침례교 5명, 오순절교회 5명, 그리스도교회 5명, 루터교 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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