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파워][김철영 목사 한복협 발표문] 새로운 시대의 복음주의 리더십(김준곤 목사의 리더십 중심으로)(202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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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영 목사 한복협 발표문] 새로운 시대의 복음주의 리더십(김준곤 목사의 리더십 중심으로) | ||||
| 2025년 6월 13일 오전 7시:서울영락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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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임석순 목사)가 6월 13일 오전 7시 서울영락교회에서 개최한 6월 월례 발표회에서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가 "새로운 시대의 복음주의 리더십 -김준곤 목사의 리더십 중심으로-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것이다.(편집자 주)
새로운 시대의 복음주의 리더십 -김준곤 목사의 리더십 중심으로-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Ⅰ. 기억
2000년 4월 19일 한경직 목사님께서 97세의 일기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었을 때 국민일보에서 김준곤 목사님께 추모의 글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김준곤 목사님은 집회 지역에 내려가 계셨습니다. 밤 11시가 되어서 목사님의 친필 원고를 팩스로 받아 정리하여 자정 무렵에 국민일보에 보냈습니다. 추모의 글은 2000년 4월 21일자에 “김준곤 목사 '한경직 목사 소천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다음은 김준곤 목사님이 쓴 추모의 글 전문입니다.
‘김준곤 목사 '한경직 목사 소천에 부쳐…'
“한경직 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1945년 10월 해방되던 해 조선신학교에서였다.목사님으로부터 교회사를 배우고 설교를 들으며 영락교회에 출석할 때였다.폐 한쪽을 절제한 때문인지 항상 좀 마른 편인 목사님은 티끌만치도 흠이 없는 품격에서 풍기는 온화하고 인자하고 겸손한 전형적인 한국 선비형 모습이었다.
엑스플로 74, 80년 세계선교대회, 84년 세계기도성회 등 내가 민족복음화운동의 일환으로 큰 대회를 준비할 때 항상 한목사님을 대회장으로 모셨다. “김목사에게 도장 맡겨 놓았으니 언제라도 필요할 때 내 이름을 쓰시오” 농하시듯 편안한 어른이었다. 특히 엑스플로 74 마지막 날 밤 여의도 강단에서 내 손에 쥐어준 돈은 목사님의 십일조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자상하신 분이었다.
목사님은 청렴과 청빈의 성자였다.1968년 서독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 때 대회가 끝나는 날 오후 각국 대표들의 쇼핑 시간이 있었는데 옆에서 지켜봤더니 목사님은 300원 정도 되는 볼펜 8개만 샀다. 김포공항 세관 검사대에서 허술한 그 분의 가방을 열었을 때 세관원이 웃으면서 “아무 것도 없네요”라고 했다. 목사님은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부터 옷을 벗어주고 봉급을 털어서 모자원, 보육원, 농아원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사랑의 실천이 목회철학의 기본이었다. 친구의 부끄러운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감춰준 수많은 일화가 있다
.8·15와 6·25를 겪으면서 몰려오는 피란민들을 위해 천막촌을 만들고 비가 오는 밤이면 일일이 천막을 찾아다니면서 병들고 배고픈 양들에게 약품 및 옷과 식량, 담요 등을 구해다주시던 선한 목자였다. 미국에서 수학한 지성인이었지만 영락의 새벽제단과 기도원에 불을 끄지 않는 기도의 목사님이었다.
싱가포르에서 1000여명의 지도자가 모인 선교대회 때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령으로만’이라는 설교를 했을 때 청중의 기립박수를 받던 일이 눈에 선하다. 그분의 신앙품성 가운데 특별히 돋보이는 것은 화합이다. 링컨은 빈 터만 있으면 꽃을 심었고 페스탈로치는 아이들이 다칠까봐 길 가다가 유리조각, 쇠붙이 같은 것을 줍고 다녔다고 한다.
한 목사님은 정통성과 정도 및 투명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일찍이 미국 유학을 하신 분인데 설교할 때 영어를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사생활은 유리알처럼 투명했다. 설교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알기 쉽게 했다. 작년 초에 남한산성을 찾았을 때 한 목사님은 북한의 아사자들과 남한 실직자를 생각하며 자주 우신다고 했다.
새천년 대희년 고난주간에 목타던 가뭄에 단비가 촉촉히 내리던 날, 4·19혁명 40주년 되던 날, 한국기독교 116년사 한복판에 유별나게 큰 거목 한 그루, 이땅 크리스천의 아버지요 스승이신 한경직 목사님은 약속의 땅으로 가셨다. 예수님처럼 우리 고난과 죄를 지고 갔을까. 이 땅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총체적 위기를 보고 우시면서 중보기도하러 가신 것일까.
아무튼 주님이 더 필요해서 98세를 살게 하시다가 주님 곁으로 불러 가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못다 이루신 그분의 통일된 기독교의 비전을 향해 마지막 도강작전을 계속해야 하겠다. 하나로 뭉쳐야겠다. 민족의 정신적 운명을 책임져야 하겠다. 김준곤 목사”
한경직 목사님이 소천하신 후 한경직 목사님을 이어 한국 교회의 이끌 지도자는 누굴일까에 대한 말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2000년 7월 15일자에는 “한경직 목사 빈자리 누가 채우나”와 “개신교 새 지도자 논의”라는 부제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다음은 기사 전문입니다.
“ '한국 개신교의 상징' 한경직(韓景職)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세 달이 지났다. 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어 있는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어른이 절실하다. 따라서 개신교계에서는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한 목사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한 논의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불교나 천주교와는 달리 제도적인 '최고 원로'가 없는 개신교로서는 자연스럽게 중론이 모아지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최근 개신교 목회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포스트 한경직'이 화제로 등장하고 있다. 개신교 교계 언론 기자들은 이에 대한 자체 설문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또 자천ㆍ타천으로 거론되는 인사들의 움직임도 부쩍 활발해지고 있다.) 한경직 목사의 뒤를 이을 목회자로 주로 거론되는 인물은 강원용(姜元龍‧83) 크리스챤아카데미 명예이사장, 정진경(鄭晉慶‧79) 서울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 김준곤(金俊坤‧75)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 등 세 명. 한경직 목사의 후배 세대인 이들 목회자들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벌여 한국 개신교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강원용 목사는 활발한 사회 활동에 따른 높은 대외적 지명도가 가장 큰 장점이다. 그리고 개신교의 대표적인 사회관련 기구인 크리스챤아카데미와 기독교장로회의 간판 교회인 경동교회를 일구어 온 지도력은 정평이 나 있다. 또한 개신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계와 사회 전반에 폭 넓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강 목사는 '진보적 인물'이라는 인상이 강해 보수 교단이 수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진경 목사의 가장 큰 장점은 원만하고 겸손한 인품이다. 그는 한경직 목사를 연상시키는 목회자다운 처신으로 높은 신망을 얻고 있다. 게다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한기독교서회, 대한성서공회 등 개신교 연합기관들의 수장을 두루 역임했으며 한국선명회(현 월드비전) 이사장을 오랫동안 역임하는 등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왔다. 하지만 장로교, 감리교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리 개신교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소수 교단인 성결교 소속이라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한다.
김준곤 목사의 경우는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이끌어 오면서 1974년 엑스플로 대회를 비롯한 수많은 집회를 통해 이룩한 선교 업적이 높이 평가된다. 현재 개신교계의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중견 목회자들이 젊은 시절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개신교 최대 교파인 예장 소속이면서도 오랫동안 초교파적으로 활동해 온 것도 유리한 점이다. 반면 목회 현장인 교회 활동의 경험이 없는 것이 철저하게 교회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국 개신교의 특성상 단점이 될 수 있다는 평도 있다.
교단, 교회, 인품 등 여러 조건을 고루 갖추었던 한경직 목사의 그늘이 워낙 크고 길었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당장 이를 대신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교계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이들 원로들이 각자 자기 역할을 하면서 함께 개신교를 이끌어가는'과두체제'가 상당 기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李先敏 기자)
4월 20일 오후에 김준곤 목사님께서 저를 데리고 영락교회에 마련된 빈소를 방문해 조문을 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조선신학교에서 교회사를 배웠고,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창설하여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민족복음화운동을 주도하셨던 김준곤 목사님은 영적 스승 한경직 목사님을 한국 교회의 교부로 생각하고 엑스플로 ‘74대회 등 굵직한 대회 때마다 모셨기에 한 목사님의 서거는 김 목사님 개인적으로도 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2003년 2월 CCC 총재직에 은퇴하신 후 성시화운동 총재를 맡아 전국과 해외를 다니시며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김준곤 목사님께서 2009년 1월 22일 집에서 낙상을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목사님의 소천을 대비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경직목사기념관을 방문해 한 목사님의 장례절차를 담은 책자를 구했습니다. 그 책자에는 1500명의 조문객 명단의 조문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김준곤 목사님은 물론 저의 이름도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소천 자료집을 참고하여 임종예배 설교자. 영정사진, 부고 보도자료 등을 준비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2009년 9월 29일 오전 11시 11분 세브란스병원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유족과 함께 임종을 지켜드린 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韓國敎會葬”으로 해달라고 하는 내용으로 팩스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유족이자 한국CCC 대표인 박성민 목사님과 장례 절차를 협의해 가며 진행을 했습니다. 특히 저명한 인사들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위원회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김준곤 목사님은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이 있는 유명 인사들의 목사님이 아니라 한국 교회와 민족 전체의 목사님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와 민족 전체가 장례위원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목사님께서 평소 “가족장으로 하고, 묘비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던 말씀을 따라 소박하게, 그러면서도 대학생 선교와 민족복음화의 비전과 열망을 더욱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 10월 2일 영락교회 본당에서 천국환송예배를 드리고 강원도 춘천시 서면 안보리 경춘공원묘원에 안장을 해드렸습니다. 저는 묘비 제막 책임을 맡아 묘비에 새길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김준곤목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맡아 추모예배와 포럼을 기획했습니다. 특히 2022년 8월과 11월에는 목사님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지원을 받아 서울과 신안에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고, 현재는 생가가 있는 고향 마을에 소박하게 기념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또한 김준곤 목사님의 역사를 발굴하여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모시고 했던 성시화운동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발표가 저에게 무척 뜻 깊고, 목사님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정리하여 한국 교회와 공유한다는 점에서 발표할 기회를 주신 한국복음주의협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Ⅱ. 김준곤 목사님의 리더십
김준곤 목사님(1925.3.28.-2009.9.29.)의 삶과 사역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은 무엇일까요.
작금의 한국 교회는 보수와 보수가 갈등하고 있고, 보수와 진보가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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