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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한인교회, 취리히중앙교회, 인터라켄교회를 섬기는 김정효 선교사 (뉴스파워 201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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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CM (211.♡.182.13)
댓글 0건 조회 1,720회 작성일 12-10-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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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넘어 스위스에서 30년 사역을!
 
바젤한인교회, 취리히중앙교회, 인터라켄교회를 섬기는 김정효 선교사
 
스위스 바젤=김철영 
 
 
1983년 2월, 총신대학원을 졸업한 한 젊은이가 스위스 땅을 밟았다. 수차례 사경을 헤매는 고통을 겪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스위스 땅을 떠나지 않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전북 임실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을 닮은 어머니 품 같은 스위스에서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상처 받은 영혼들을 보듬고 있다. 그가 김정효 선교사. 
 
주일예배 겸 2012유럽성시화순회대회가 열린 스위스 바젤한인교회에서 만난 김정효 선교사의 첫 인상은 순박한 시골의 농부와 같은 착함과 어진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김 선교사는 바젤한인교회, 취리히중앙교회, 융프라우에 있는 인터라켄한인교회 등 세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역시 순박한 이미지의 최옥순 사모가 늘 함께 했다. 최 사모의 고향은 전남 함평. 간호사로 일하면서 김정효 선교사의 곁에서 묵묵히 사역을 뒷바라지해왔다.

김정효 선교사가 스위스 땅을 밟은 것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신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 머리가 너무 심하게 아팠다. 이틀사흘 간격으로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머리에 혹이 있다는 검사결과가 나왔다. 당장 수술대에 누웠다. 그런데 수술 후 완전히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수술후 5일만에 깨어났다. 그러나 반신 불수가 되어 대소변도 받아내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는 그후에도 세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이틀사흘 간격으로 응급실에 실려오는 김 선교사는 소문난 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는 아팠다. 특히 귀 뒤쪽이 심하게 아팠다. 3년을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는 어렵게 자신이 수술을 받은 대학병원의 직원으로 취업을 했다. 중환자이면서도 병원 직원으로 일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아내도 같은 대학병원에서 일했다. 그러나 자기 몸도 추스르지 못하는 그를 병원측은 쫓아내려고 했다. 3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면서 김 선교사는 한주, 20일씩 금식기도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지금도 그는 자주 금식을 한다.

“하나님 앞에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어요. 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할 때 마침 바젤에 사는 공성희 권사라는 분이 전화를 주셨어요, 바젤에는 목사님이 안 계시니까 와서 사역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더군요. 2명이 있었어요.” 바젤한인교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김 선교사의 건강은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다. “귀 뒷쪽에 염증이 생겼어요. 뇌피와 가까운 곳인데, 엄청 아팠어요. 병원에서는 .빨리 수술 안 받으면면 위험해진다고 말했지요. 4번째 수술을 권면했어요. 그러나 저는 계속 수술을 받지 않겠다 버텼지요. 죽을 때까지 바젤교회를 사역하다가 죽겠다는 심정이었어요.”

그런데, 기적이 생겼다. 어느 날, 병원 탈의식에서 수술과장과 마주쳤다. 그 과장은 김 선교사에게 “아니, 당신 수술실에서 일합니까? 당신 몸에 고질적인 염증이 있는데 수술실에서 일합니까? 병원에 신고해야겠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병원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당장 수술 받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스위스에서 이 분야의 수술 1인자 교수를 소개해 줬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수술을 받게 되면 목회도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3년간 병원에서 일도 제대로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3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수술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정해진 날짜에 병원에 갔더니 수술과장이 새로운 교수에게 제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해요. 그런데 설명을 듣는 교수가 ‘수술을 안 해도 되겠네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자 저를 치료했던 의사가 ‘말도 안됩니다’고 해요”

그의 눈 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교수는 김정효 선교사의 상처를 유심히 살피더니 “간호사, 이 사람 몸에 손을 대지 마. 수술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라고 말하면서 확신 있는 목소리로 김 선교사에게 “다시 아프면 수술 받으러 오라”고 했다.

“그 때 저는 당장 수술을 안 해서 좋고,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어요. 2~3일마다 응급실에 실려가는 등 3년을 고생했는데, 그 후 병이 나아버렸어요. 그 후 한 번도 아프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특별한 치유의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스위스 땅을 밟았던 그가 목회사역에 헌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김 선교사는 60이 넘은 지금도 매주 산동네를 거뜬하게 뛰어 다닐 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바젤한인교회, 취리히중앙교회, 융프라우 인터라켄한인교회를 사역하고 있다. 바젤에는 한인교회가 하나 밖에 없다.

그는 바젤에서 처음 교회를 시작했을 때의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바젤에서 처음 사역 시작할 때 그 지역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한 분에게 찾아가서 교회 나오라고 권했는데 싫다고 해서 그냥 왔어요. 몇 년 후 간호사 부인이 자기 발로 교회를 찾아왔더라구요. 남편이 폭력적이어서 잘 견디다가..아들 하나가 청년이 되면서 아버지가 아들을 습관적으로 때려서, 아들 때문에 집을 빠져나와 경찰보호를 받다가 교회 출석하게 되었다고요.”

그 부인은 착실하게 교회를 출석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하루는 그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사님, 우리 아들이 뇌암이래요. 벌써 수술했어요’라고 그래요. 그래서 바젤대학병원에 찾아갔어요. ‘우리 아들한테 안수기도해 주세요’라고 해서 안수기도를 해줬어요. 그리고 며칠 후 전화가 왔어요. 아들이 벌써 휴가 떠났다고 그래요.”

알고 보니 수술할 상황이 아니어서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돈을 줘서 보냈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1년간 그 아들은 투병 생활을 했다. 의사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이 아이의 상태는 악화되어갔지만 예배 후 그 집에 가서 안수기도를 해 줬다. 마지막 찾아갔을 때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부인은 김 선교사에게 만일 아들이 죽으면 독일어로 장례식을 인도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김 선교사는 한 번도 독일어로 장례식을 해본 적 없어 기도했다. 그런데 마침 현지인 교회당을 빌려서 교인들과 성경공부를 하는 날인데, 모두가 일정이 있어서 성경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현지인 교회당에 들렀고, 마침 현지인 장례식을 하는 것을 보고 메모를 해뒀다가, 그 아들이 죽자 독일어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김 선교사에 따르면 스위스 전국에는 2200~2300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절반이 임시 체류자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에서 온 사람들이다. 바젤에는 100여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그중에는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온 청년들도 있다. 바젤에 하나 밖에 없는 바젤한인교회가 이들의 신앙의 보금자리다.

“청년들의 신앙도 좋고, 움악 실력도 좋아요. 3시간 반 동안 오페라 공연에 출연할 때도, 공연 전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 청소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공연을 하러 갑니다.”

그는 바젤은 기독교 역사에 매우 뜻 깊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바젤은 대역작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여 출판한 곳”이라며 바젤에서 성시화대회가 열린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친구 니코라스 코프의 파리대학장 연설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후 이 일로 인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이곳저곳으로 피해다니다가 마침내 바젤에 도착하여 한동안 이곳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그의 일생일대의 대역작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여 출판한 곳이다.
 
그는 또 “바젤은 위대한 종교개혁자 요한네스 외콜람파디우스를 배출한 도시”라고 소개했다. 요한네스 외콜람파디우스는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와 동시대의 인물로 쯔빙글리와 가까이 교류하면서 쯔빙글리가 취리히시의회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단행해 나가는 동안 그 역시 바젤시의회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바젤의 종교개혁을 단행해나갔다.
 
요한네스 외콜람파디우스는 쯔빙글리보다 한해 먼저 태어났지만 쯔빙글리가 카톨릭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몇주 후 그 역시 명을 달리하여 바젤교회당에 묻혔다.
 
김 선교사는 “바젤을 신학의 도시”라고 설명했다.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바젤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어요. 하지만 지금 바젤대학의 신학은 많이 좌경화되어 있습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김 선교사는 바젤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융프라우 지역의 인터라켄에 한인교회를 개척해 사역하고 있다.

“주후 6세기에 아일랜드에서 선교사 성 베아투스라는 분이 이곳에 파송 받아 왔어요. 그분은 스위스 툰지역으로 찾아왔어요 .아주 깊은 원시사회로 들어온 것이지요. 그분은 이 지역을 다니면서 죽을 때까지 사역하다 돌아가셨어요. 중요한 것은 그분에 대한 많은 기록은 없지만,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성자란 칭호를 받았어요.”

성 베아투스가 죽은 후 많은 수도자들이 그 지역을 찾아와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기도하고 갔다. 그러던 중 어떤 분이 순례자들이 많이 찾아오기 때문에 기도처소가 필요하다고 해서 인터라켄에 조그만한 기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어거스틴파에서 정식 수도원을 개설했다. 황제 로타르와 상인들이 수도원을 후원해 주면서 인터라켄 전 동네가 수도원이 되었다. 수도원이 생긴 지 400년이 지나자 여자와 남자 수도원이 따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수도원에 있는 그분들 하루 일정표를 보면 매일 새벽 3시반에 기상해요. 그때부터 2시간반 간격으로 기도, 찬양, 말씀묵상을 매일처럼 저녁 8시반까지 되풀이해요. 오후 2시 이전에 밥을 먹고 하루를 보냅니다.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수도사들이 금욕생활을을 시킵니다.”

김 선교사는 “그 수도원이 생긴지 400년이 되던 해 쯔빙글리가 순교했고, 5년 후 칼빈이 제네바에 입성했어요. 하나님은 당신의 작정계획을 갖고 계시지만, 먼 훗날의 역사를 위해 먼저 400년 동안 기도가 쌓이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애굽생활 430년 후 출애굽사건과 광야 40년 사건처럼 말입니다.”

인터라켄 수도원의 역사와 그들의 삶을 담담하게 설명하는 김 선교사를 보면서, 어쩌면 그도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이 땅을 밟았고, 성 베아투스처럼 그렇게 이곳에서 제2의 베아투스처럼 살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작정계획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먼 훗날 그에 대해서도 그런 역사적 평가와 기록이 남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인터라켄 수도원에서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와 칼빈(John Calvin,1509-1564)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다. 쯔빙글리는 취리히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쌍테가르라는 지역의 한 수도원에서 태어났다. 

“만일에 베른시의회가 쯔빙글리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쯔빙글리가 칼빈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스위스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에 의해 종교개혁이 교리적, 학문적, 조직적으로 갖춰지면서 오늘날 개신교의 모습이 확립되었어요.”

김 선교사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쯔빙글리가 회합을 한 적은 있지만, 서로의 입장차이가 있어서 함께 종교개혁운동을 펼치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 이후에 종교개혁운동을 펼쳤다.

그는 교회의 정치와 조직이 스위스 의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에서 온 칼빈은 민주주의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칼빈이 오기 전에 이미 스위스에 오기 이전에 이미 민주주의의가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위스가 근대 역사에 있어서 종교개혁 뿐 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 신대륙과 화란, 영국 등으로 가서 개혁신학과 개혁신앙을 전파했다고 말했다.

“만일 칼빈이 없었다면, 쯔빙글리가 없었다면, 인터라켄이 없었다면…”그의 독백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는 2012유럽성시화운동 대표단들에게 “성시화운동은 한 가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중보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뭔가를 이루실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종교개혁의 진원지와 같은 역할을 했던 스위스는 지금, 영적으로 황무한 땅이 되었다. 딸만 둘을 두고 있는 김 선교사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청소년들은 담배를 피우지 말게 되어 있어요. 가게에서 청소년들에게 술과 담배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은 있는데 시행이 안 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스위스 청소년들 안에 마약문제, 문란한 성생활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요.”

김 선교사는 청소년들이 술과 담배, 마약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학교 교장을 찾아갔다. 지역공동체도 찾아갔고, 정당도 찾아가서 강력한 술과 담배 판매금지를 호소했다. 심지어는 백화점 체인에 전화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스위스는 민주주의 국가인데, 외국인 주제에 라며 비아냥을 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았어요. 그러나 계속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몇 년 동안 모든 학교에서 금연연이 시행되고 있었어요 .엄청나게 바뀌었어요.” 기도하면서 잘못된 환경을 바꾸려는 시도가 성공할 수 있으면 확인한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김 선교사의 딸이 베른에서 제일 큰 교회 예배당에서 합창 발표회를 가졌다. 1000명 규모의 예배당에 30프랑이 넘는 입장료를 내고 학부모들과 주민들이 관람했다. 합창단의 주제가 ‘예수의 생애’였다. 문제는 발표회 중간 중간에 한 목회가 올라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는 사기꾼이다. 그는 사람이면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기만했다. 예수의 부활은 날조된 것”이라는 둥 반기독교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김 선교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분개했다. “목사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심하게 항의를 하면서 망신을 줬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쳤지요.”

칼빈과 쯔빙글리 등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활동했던 스위스의 영적 상황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스위스는 국가가 종교세를 거둬서 국가교회 목회자들에게 월급을 준다. 장관급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목사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러나 반대로 목회자들은 복음의 열정을 잃어버렸다. 신학은 자유주의에 빠져버렸고, 신앙과 삶은 세속화되어 버렸다. 동성애자 목사들이 스스로 커밍아웃하면서 사생활을 간섭하지 말라고 말해 교회가 분열된 사건도 발생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고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목회자들이 늘고 있다. 물론 정부에서 주는 급여도 거부하면서 말이다.

“스위스에서 100명이 넘으면 큰 교회입니다. 보통 30명 정도 모이면 보통 교회 정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설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이지 않습니다.”며 “카톨릭에서는 티벳의 승려 달라이라마를 데려다가 강연도 듣고 합니다.”며 바른 신학에서 이탈한 것을 지적했다.

김 선교사는 “복음적 설교와 신앙적 삶에 대한 바른 교육은 바른 신학교육으로부터 시작되어집니다. 복음적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하게 하는 성경적 신앙관을 옹호하고 확산하게 하는 교육훈련이 복음적 신학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화란의 복음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도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목사에서 신학자, 신학자에서 언론인, 언론인에서 정치가로 그의 활동 영역을 넓혀갔어요. 그의 목표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케 하는 참다운 기독교 문화의 확산이었습니다.”고 설명하며 성시화운동을 통해서 교회 내에 참다운 기독교문화가 회복되어지고, 세상에 참다운 기독교 문화가 확산되어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정효 선교사는 종교개혁자 존 칼빈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특히 한국 교회 일부에서 칼빈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칼빈이 제네바에서 황제처럼 군림했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라는 것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쉽게 마음은 열지 않습니다. 칼빈은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망명을 온 사람이에요. 스타라스버그에 있을 때는 시민권을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나 제네바에서는 불과 죽기 몇 년 전에 시민권을 받았어요..시민권이 없다는 것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이란의 호메이니처럼 군림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김 선교사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위그노들이 스위스로 많이 왔다. 그들이 시계기술을 가지고 들어와왔는데, 위그노들은 개신교도였다.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자 스위스 시민들이 집단으로 시위를 하면서 10년간 위그노들에게 참정권 주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 선교사는 킬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처형 당했다는 주장도 반박했다. 특히 삼위일체를 부인한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09-1553)사형 언도에 대해서도 칼빈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등 워낙 자기 주장이 강해 스페인에서도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입니다. 당시 칼빈은 교회에서 목회만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네바 시의회에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진리가 아니라며 사형을 시킨 것입니다. 사형이 언도되자 칼빈은 오히려 빈이 제네바 시의회에 화형 언도가 너무 중하다고 건의를 했어요.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가 칼빈의 건의를 무시하고 화형을 시킨 것입니다.”

김 선교사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25년간 성 피에르교회에서 목회를 했지만, 직접적으로 제네바 시의회를 좌지우지 하지 않았다고 거듭 밝혔다. 칼빈의 영향력은 교회 안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이 죽기 전 제네바 시의회에 일어난 사건으로 시 의원들을 비판했다가 하마터면 화형당할 뻔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면서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 갖고 있는 칼빈이 제네바 시의회를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했다는 잘못된 오해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했다.

1530년 대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를 할 당시 제네바 인구는 7,000명 정도였다. 김 선교사는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집필한 것 외에도 1559년 6월 5일 제네바아카데미를 개교해 전 유럽에서 1500명의 학생들이 칼빈의 신학과 사상을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고, 그들이 다시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서 개혁신학과 개혁신앙을 전파했다.”며 바른 신학, 바른 신앙의 수호를 강조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제네바대학이 되었다.

온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스위스에는 교회당 건물이 어느 곳이든지 건물이 제일 크고, 제일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항상 교회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시의회 옆에는 항상 교회건물이 있는데, 교회 건물이 제일 높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징입니다.”

“항상 교회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라”,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하지 못한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낯선 이국땅에서 첫발을 딛자마자 생사를 넘나드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았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오늘도 묵묵히 바젤로, 취리히로, 인터라켄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를 이곳에 보내신 신실하신 하나님,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아이랜드 선교사 성 피에투스처럼, 그도 이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 최옥순 사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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