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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통일, 크리스천의 역할 크다" (뉴스파워 2014.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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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CM (121.♡.136.67)
댓글 0건 조회 822회 작성일 14-10-2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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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일은 독서독 통일 24주년 기념일이다. 동서독이 통일문서에 공식 서명한 날이 1990년 10월 3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베를린 장벽 붕괴일은 그보다 1년 전인 1989년 11월 9일이다. 독일은 동서독 통일의 날과 베를린장벽 붕괴일을 기념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남북 분단 69년, 내년이면 분단 70년이 된다. 한국 교회는 통일을 염원하며 기도를 해왔다. 만일, 남북 분단의 상징 38선이 어느 날,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일까.
▲ 피셔 목사     © 뉴스파워


 지난 10일, 독일성시화운동본부(대표회장 김현배) 주최 ‘독일 통일의 사례와 통일 코리아의 비전’을 주제로 베를린비전교회에서 열린 2014 베를린성시화컨퍼런스에서 ‘독일 통일과 독일 교회들의 역할’에 대해 발표한 피셔(Z. Fischer) 목사(독일 다니엘 교회)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저는 교회 식구들과 사택에서 구역모임을 하고 있었다. 그날 한 성도가 늦게 도착을 하였는데 도착하자마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저희는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처럼 TV를 켜서 뉴스를 들었다. 저희들도 도마처럼 직접 가서 보고 만져보고 싶어 했다. 구역모임을 마치고 성도들은 집으로 다 돌아갔다. 이 날 밤 많은 사람들과 통화하였고 몇몇 성도들은 직접 장벽으로 가서 그 현장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피셔 목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갑작스럽기는 하나 그 이면에 여러 요인들이 있다.”며 “동독은 몇 달 전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가 설립 4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이었다.”고 소개하고 “그때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늦게 오는 사람은 삶이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동독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국가의 변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하였다. 동베를린과 라이프찌히 그리고 동독의 많은 도시들에서 시위는 이어졌고 사람들은 ‘우리가 국민이다 (Wir sind das Volk, we are the people)’ 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동독 시민들은 프라하에 있는 서독 대사관의 담을 넘으면서 동독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였고 헝가리아 국경을 통하여 수천명의 시민들이 동독을 빠져나갔다. 동독의 수뇌부는 시민들의 시위와 탈출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고뇌하였지만 마땅한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였고 소련에서도 어떠한 지원과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는 “결국 11월 9일 결정적으로 동독 정부 대변인 귄터 차보스키(Günter Schabowski)가 이날 저녁 기자회견 자리에서 동독 모든 시민들이 당장 여행비자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며 “사실은 이 새로운 정책은 11월 10일부터 적용되는 정책이었으며 모든 사람이 아닌 사전에 신청을 하고 허가를 받은 사람에 한해서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차보스키(Schabowski)의 착오로 그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당장 새로운 정책이 유효하다고 발표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차보스키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의 질문에 엉겁결에 기자회견문에도 없는 ‘오늘 당장’이라고 말해버렸다는 것이다. 동베를린 시민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고 장벽으로 향했고 동서베를린 국경을 관리하는 경찰들은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몰려오자 당황했다. 결국 그들은 그날 저녁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국경을 개방했다.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피셔 목사는 “하지만 장벽이 무너지는데 긴 시간의 일련의 과정이 있었고 매우 복장한 상황들이 있었다.”며 “정치적으로도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통일에 있어서 독일교회를 설명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역사와 독일의 지난 500년 역사 속에서 발전된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유럽과 독일의 분단 과정을 먼저 설명했다.
 
피셔 목사는 “나치정권의 패망과 함께 전 유럽에 연합군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연합군의 숙제 중 하나는 독일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은 분할되어 영국, 프랑스, 미국 그리고 소련과 폴란드에 의해서 통치되었다.”며 “전쟁 후 독일은 분할되었으며 도시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군사정권의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래도 분할된 지역간의 여행과 교류는 가능했다. 하지만 서방국가들과 소련과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이 고조되면서 나누어진 지역간의 분단 상황은 더욱 발전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특이한 점은 독일의 분할된 상황이 베를린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동베를린은 소련체제 아래로 서베를린은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 체재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며 “베를린 시민들은 사는 곳과 직장이 다른 위치에 있기도 하고 전철과 버스 노선도 도시 한 끝에서 시작하여 다른 끝에서 끝났기도 했다. 서베를린에서 사용되는 전기가 동베를린에서 생산되기도 했다. 이렇게 한 도시였던 베를린은 동방과 서방의 갈등이 국제적으로 점점 악화될수록 독일과 베를린의 분단도 점점 고조되었다.”고 밝혔다.
 
“결국 1949년 각각 서방과 소련의 영향을 받는 두개의 국가가 독일 안에서 세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과 갈등은 독일과 베를린에 계속 심화되어 결국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고 서베를린은 정치적 섬이 되었다.”고 밝힌 피셔 목사는 “중요한 것은 독일과 유럽 전체에 나타난 동서간의 분단은 하루아침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 히틀러를 무너트리기 위해 연합군을 이룬 동맹국들 간에 갈등과 적대감이 깊어지면서 생겨났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과정으로써 독일은 점차적으로 분단국가로 발전된 것이라는 것이다.
▲ 피셔 목사는 동서독 크리스천들이 통일 독일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 뉴스파워
피셔 목사는 ‘독일에서 교회와 국가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했다.
 
“유럽에서는 콘스탄틴 황제를 통해서 일종의 국교가 시작되었고, 몇백년이 흐르면서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교회와 국가의 권력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었으며 싸움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권력과 교회의 권력은 많은 경우 서로 얽혀 있었으며 어떨 경우에는 국가의 권력이 곧 교회의 권력이었다.”
 
피셔 목사는 “종교개혁 직전에는 유럽과 독일에서 이러한 권력 다툼이 극에 달했다.”며 “독일은 그 당시 통일 된 국가가 아닌 한 황제 아래 있는 여러 소국가들의 연합체였다. 독일은 중앙 유럽 전체를 통치했고 이탈리아까지 뻗어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동시에 그때 불어온 철학적, 문화적 계몽운동은 새로운 사고 체계를 가지고 왔다. 새로운 사고로 인해 사람들은 각자의 권리에 대해서 그리고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며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가 있다는 생각도 새롭게 형성되었고, 여러 학문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진리들, 신대륙의 발견,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사실의 발견 그리고 인쇄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지식과 생각들이 널리 전파될 수 있다는 이 모든 상황과 환경이 사람들의 자아의식과 세계관을 바꾸었다.”고 밝혔다.
 
피셔 목사는 또 “여기에 더불어 여러 독일 소국가 통치자들은 황제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환경과 상황들이 종교개혁의 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소개하고 “이렇게 점화된 종교개혁을 통하여 옛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이 크게 충돌하였으며 긴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종교 개혁 이후의 30년 전쟁은 중앙 유럽 대부분을 황폐한 땅으로 만들었고 독일의 많은 지역들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살지 않았으며 흑사병 또한 그 때의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밝혔다.
 
“그 당시에 독일의 소국가들은 그들만의 국교를 선포하기 시작했다. 카톨릭, 개신교-개혁주의, 개신교-루터주의, 소국가의 통치자는 동시에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 당시 세력을 키우는 프로이쎈에서는 개신교-루터주의가 국교였지만 나중에 프로이쎈 왕이 개혁주의로 종교를 바꾸면서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를 하나로 합쳤다.”며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그래서 독일 제국의 멸망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설립 때까지 프로이센국 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베를린 주교였다. 그리고 이 전통이 이어져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베를린이 분단되었어도 베를린과 그 주위의 교회들은 서로 하나의 교회라는 정체성이 매우 강했다.”고 밝혔다. 그는 “물론 베를린 장벽이 생기고 왕래가 힘들어지면서 현실적인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의식 속에는 국가가 나뉘었어도 교회는 하나라는 개념이 존재했다.”고 밝혔다.
 
피셔 목사는 동서독의 다리 역할을 한 것은 교회였다고 설명하면서 “이 모든 복잡한 역사와 사실관계 속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기독교와 교회는 유럽의 문화와 국가제도와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와 그 산하에 있는 많은 단체와 기관들은 유럽과 독일 사회에서 떼어낼 수 없는 부분”이라며 “동독은 교회의 이러한 영향력을 제어하고 억제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이러한 노력이 효과를 거둔 것 또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피셔 목사는 “하지만 교회는 사회의 중요한 기관으로 남았다. 동독의 교회는 체계가 잘 잡힌 기관이었으며 국가로부터 독립된 공간으로써 반대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낼 수 있는 곳이었다.”고 밝혔다.
 
이는 동독교회와 북한교회의 큰 차이이기도 하다, 북한 교회는 철저하게 북한 정권의 압제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위치에 있지도 않고, 더욱이 북한 정권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그는 “동독교회와는 다르게 서독 교회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서독에서는 교회는 국가로부터 인정받는 ‘공공 법인’ (Körperschaft öffentlichen Rechtes) 으로써 재정과 모든 행정을 스스로 관리했다.”고 밝혔다.
   
피셔 목사는 “동서 베를린 교회들은 역사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그들을 연결시켜주었다. 이러한 동서독 교회 간의 협력 관계는 두 국가간의 분열이 완화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며 “동독의 교회들과 기관들은 서독의 교회들로부터 재정적으로 큰 후원을 받았다. 또한 동서독 교회간의 자매결연은 무신론주의 국가임을 선포한 동독일에 있는 동독 교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고 밝혔다.
 
피셔 목사는 또 “동독이 점점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동독에 있는 교회들도 조금 더 편하게 활동할 수 있었으며 교회 건물을 새로 건립하는 것도 허락이 되었다.”며 “서방 국가들과 소련간의 정치적, 이념적 갈등으로 인하여 동서독 분열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냉전 중후반 이후로는 이러한 정치적 갈등이 해소 되는 분위기가 국제적으로 일어났다. 교회는 이러한 기회들을 놓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동서독을 막론하고 여러 다양한 모임들과 컨퍼런스들이 개최되었으며 동독 교회들도 초대되어 참석함으로 두 분단된 국가가 한발씩 가까워 질 수 있는 계기들이 마련되었다. 또한 유럽의 연합이라는 새로운 이념은 동서독의 적대심이 해소되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동서양진영을 해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소개했다.
 
“동서독 교회들은 모두 화해와 용서의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특별히 서독에 있는 교회들은 화해와 용서의 정치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많은 부분에서 노력했다.”고 밝히는 피셔 목사는 “이것은 국가와 교회의 새로운 관계 덕분이다. 교회는 독립된 기관이지만 합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독의 교회들은 서독 교회들만큼은 정치에 직접적은 영향을 줄 수가 없었다. 동독은 근본적으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 교회들이 느끼는 한계가 많았지만, 동독도 사회 전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기독교적인 바탕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즐기고 감상하며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실한 신앙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으며, 종교개혁 당시 개혁을 위해 일어난 농부들을 개혁의 모델로 삼고 싶다면 그들의 신앙 또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를 하고 싶다면 몇백년 동안 문화 속에 녹아든 기독교와 기독교인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적인 가치를 지지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피셔 목사는 “이처럼, 독일 통일에 있어서 외부적이고 지정학적인 요소들이 큰 영향을 주었지만, 교회들도 큰 역할을 했다.” 며 독일 통일 과정에 있어서 정서적, 문화적 장벽과 그 장벽을 없애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노력을 설명했다.
 
그는 “동서독 통일이 되기까지 분단의 시간 동안 독일 내에서는 정서적, 문화적 장벽들이 생겨났다.”며 “사회적 정서와 가치들은 40년 분단의 시간 동안 변했다. 40년이라는 짧다고 하면 짧은 분단의 시간 동안 다른 생활방식과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다른 편에 같은 독일인이 살아도, 같은 독일인이 아니라 동독인 아니면 서독인이었다.”는 것이다.
 
피셔 목사는 “물론 많은 소국가들이 함께 통일국가를 형성한 독일의 역사가 이러한 정서적 문화적 차이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작센과 바이에른, 프로이쎈과 웨스트팔렌, 북독일과 남독일은 전통적으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며 “하지만 분단의 시간 동안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은 빠른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여 큰 차이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피셔 목사는 이러한 장벽들을 완화하는데 독일 크리스천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통일의 과정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했다면서 가끔은 공적인 자리에서 역할을 했지만, 대부분은 드러나지 않게 개인의 삶 속에서 실천했다고 소개했다.
 
피셔 목사는 “예를 들면 편지를 쓰는 일, 여러 물품들을 선물로 보내는 일,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독을 방문하는 일, 떨어진 친척들과 계속 연락하는 일,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는 일 등 분단을 통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여러 문화적, 정서적 장벽들을 최소화 시키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위치에서 책임을 다했고, 나머지 모든 기독교인들은 잘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소금으로써의 역할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변화시킨 누룩으로써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밝혔다.
 
피셔 목사는 “독일 통일에 나타난 교회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교회 역사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 성도들도 자신의 삶 가운데서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다.”고 강조하면서 “크리스천 개개인이 그들의 삶에서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는데 역할을 한 것이 우리 모두에게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더라도 그 당시를 살았던 그분들의 마음 속 보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셔 목사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현재 한국의 상황과 그 당시 독일의 상황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이러한 사실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예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분께서는 한국을 위해서도 통일의 길을 여실 것”이라며 한국 크리스천들의 남북 통일을 위한 역할을 격려하면서 “하나님은 다른 통치자들도 자신의 종들로 변화시키셨다. 북한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독재자의 집단도 모두 하나님의 크신 역사 속에 한 부분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피셔 목사의 발표는 우리에게 교훈을 던져준다. 공적인 위치에 있는 크리스천 지도자들은 그 위치에서 남북 통일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역할을 감당해야 하고, 크리스천 개개인은 남북 통일을 위해 드러나지 않지만, 기도하면서 통일을 위한 섬김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크리스천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궁극적으로 통일의 문을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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