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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죽더라도 항복하지 말라" (뉴스파워 2015. 0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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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CM (121.♡.136.244)
댓글 0건 조회 752회 작성일 15-03-2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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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23일 첫 삽을 뜬 애국지사 손양원 생가와 기념관 공사는 6월 말 완공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 손양원 목사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다.   구신회 장로와 이종승 목사가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파워
 24일 오후 이종승 목사(경남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와 함께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 건축 현장을 방문했다. 손양원 목사가 출석했던 칠원교회(담임목사 최경진) 구신회 장로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초가집을 복원한 생가는 완공이 된 상태였고, 기념관은 아직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생가와 기념관 뒤편으로 대나무들이 푸르른 빛을 더 하며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믿음과 신의와 충성을 다하다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긴 산돌 손양원 목사, 그와 함께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고 천국문에 입성한 선진들의 모습같이 보였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
 
그러나 구신회 장로로부터 손양원의 부친 손종일 장로에 얽힌 일화를 들으면서, 나중에 <칠원교회 100년사>를 받아 읽으면서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격언이 생각이 났다.
 
우리는 손양원은 잘 알고 있다. ‘20세기 사랑의 원자탄’으로 일제 신사참배에 투옥이 됐고, 음성 한센병자들의 공동체 애양원에서 사역하면서 그들의 상처에 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면서 예수 사랑을 실천했고, 여순사건 당시 두 아들을 죽인 학생 안재선을 양 아들로 삼았던 용서와 화해를 실천했던 성자, 6.25 때 애양원을 떠나지 않고 공산당에 의해 총살 순교했던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 손양원 목사 생가 마당에 있는 샘과  방아     ©뉴스파워
 그런데 손양원의 순교신앙은 부친 손종일 장로의 영향이 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신회 장로가 선물한 <칠원교회 100년사>에는 ‘믿음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그 글에 의하면 손종일 장로는 칠원교회 첫 집사이자 초대 장로로, 일제치하 암울했던 시절, 목회자도 없었던 당시 칠원교회를 목회자 이상으로 잘 이끌었던 칠원교회의 믿음의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손 장로는 38세인 1909년 4월 13일, 예수를 영접하고 상투를 자른 후 5월 3일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교회 출석한 그날로 즐기던 술, 담배를 끊어버렸고, 성묘하기 힘든 곳에 있는 형님의 묘를 날도 받지 않고 이장(移葬)하여 집안 어른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한 달 이상을 자리에 누워지내야 했다.
 
또한 제사 지내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알고 문중 일가들이 다 모여 시제를 지내던 날, 제사상을 홀랑 엎어서 난장판을 만들어 또 한 번 일가 친척들로부터 집 옆 감나무에 묶인 채 뭇매를 맞는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안 식구들이 다 집을 비운 사이에 제사용기인 제기들을 모두 꺼내어 불을 놓아버렸다.
 
손종일은 1919년 3월, 3.1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될 당시에는 박순익, 박경천, 엄주신 등 성도들과 함께 칠원지역의 만세운동을 앞에서 이끌다 일경에 체포, 마산형무소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살았다.
 
특히 1940년 9월 장남인 손양원 목사가 여수 애양원교회 시무 중 신사참배 반대자로 구속이 되면서 가족들끼리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자 손부산으로, 평양으로 옮겨다니면서 가족을 이끌었으며, 1944년에는 장손인 동인 군의 일본 군대 징빕을 막기 위해, 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로 결정을 내린 다음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만주 하얼빈의 둘째 아들(손문준)네 집으로 갔다가, 거기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 해방을 4개월 앞둔 1945년 4얼 13일 세상을 떠났다.
 
손종일 장로는 가정에서 새벽기도는 물론 아침, 저녁 가정예배와 주일성수,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했고, 어린 자녀들까지도 지키게 했다. 손양원 일곱 살 때부터 주일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손 장로가 장로 장립을 받았던 1919년 1월 15일 이후 가정에서 드리던 새벽기도는 자연스럽게 칠원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시작되었다.
▲ 손양원 목사 생가와 기념관 맞는 편에 세워지고 있는 칠원교회     ©뉴스파워

  “옥중에서 죽을지언정 항복하지 말라”
 
손종일 장로는 장남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로 체포돼 여수경찰서에 끌려가던 날1940년 9월 25일, “잠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직 인사를 드리는 아들을 향해 “누가복음 9장 62절과 마태복음 10장 37-39절 말씀을 기억하라.”고만 말하고 돌아서버렸다. 감옥에서 죽을지언정 배도는 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고 싶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손 장로는 손 목사가 구속된 후 일제가 애양원 지도자들인 미국 선교사들을 강제 출국시키고 안또라는 일본인을 원장으로 앉히면서 “사상범의 가족을 더 이상 사택에 머물게 할 수 없다.”며 가족들마저 교회에서 쫓아내자 칠순을 앞둔 나이에도 부산으로 평양으로 옮겨다니면서 식량을 얻어와 손 목사 가족을 돌봤다. 손 목사 자녀들도 흩어졌다. 장남 동인은 일본 군대의 징집을 피해 남해의 깊은 산골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차남 동신은 진주 옥종면 나환자 촌으로, 어린 딸은 부산으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손 목사가 만기출소일이 가까워올 무렵, 형무소 소장이 손 목사를 전향시킬 목적으로 손종일 장로에게 “당신이 아들에게 권면하는 편지를 써서 신사참배를 하도록 하여 사방에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모아 가정을 이루도록 해 보시오.”라고 회유를 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손 장로는 “신앙을 떠난 생활은 죽은 생활이나 같으니 옥중에서 차라리 죽을지언정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편지를 손 목사에게 보냈다. 편지를 사전 검열한 형무소 소장은 노발대발하면서 “그런 못된 아버지가 어데 있는가?”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양원이라는 이름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부르던 이름”
 
손양원 목사, 그의 이름을 들으면 애양원에서 사역을 하면서 양원으로 이름으로 고쳐 부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구신회 장로는 “양원이라는 이름을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호적에는 연준으로 올려져있다.”고 말했다. 구 장로는 손양원 목사의 학습과 세례를 받았을 때도 명부에는 연준 대신 양원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구 장로는 생가 왼편에 있는 감나무를 가리키면서 손종일 장로가묶여 있는 곳이 아마 그 나무 근처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칠원교회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기 전 집에서 새벽기도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생가 뒤편에 작은 기도굴을 만들어 기도했다고 소개하고, 기도굴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생가 마당에는 우물이 있다. 우물도 그대로 복원할 계획이다.
▲ 손양원 목사의 모교회 칠원교회 100년사     ©뉴스파워
 이종승 목사는 생가와 기념관 건립을 맡은 건설회사 대표의 부모와 손양원 목사와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손양원 목사가 유치장에 있을 때 사모와 아들을 챙겨준 김재언 경찰서장, 그리고...

1940년대 후반 손양원 목사가 좌익혐의로 전라남도 강진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던 적이 있다. 한 번씩 면회를 오던 사모와 어린 아들을 김재언 경찰서장이 측은히 여겨 자기 집에서 숙박을 하게 해줬다.
 
손 목사와 김재언 서장은 6.25 때 순교를 당하고, 순직을 당했다. 당시에는 김재언 서장 가족은 예수를 믿지 않았으나, 미망인과 자녀들은 부산으로 와서 살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재언 서장의 손자 사위 서재찬 사장이 운영하는 코너스톤종합건설이 지난해 4월 26일, 경상남도청이 발주한 손양원 목사 생가와 기념관 공사 입찰에 응모해 39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시공사로 선정이 된 것이다. 그것도 2위를 차지한 기업과는 입찰 단가가 92,000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생가와 기념관 도로 맞은편에는 칠원교회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구신회 장로는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신앙을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배우러 찾아왔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손양원 목사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위해 앞장을 섰던 이종승 목사는 “경남 선교의 뿌리를 정리한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과 호주선교사 묘원을 시작으로 주기철 목사님 기념관,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을 연계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애국(愛國) 애민(愛民)정신을 전수하는 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세상과 일제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은 믿음의 본을 보인 주기철,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애족, 애민 정신의 발원지는 가정이라는 사실이다.
 
생가와 기념관이 완공되면 가족끼리 꼭 한번 다녀가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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