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봉 목사 설교 듣고 살인죄도 회개" (3) (뉴스파워 2018. 11. 16. 14:57) > 신문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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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봉 목사 설교 듣고 살인죄도 회개" (3) (뉴스파워 2018. 11. 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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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CM (14.♡.23.63)
댓글 0건 조회 618회 작성일 18-11-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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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봉 목사 설교 듣고 살인죄도 회개" (2)에 이어서 -
 
6. 이성봉목사의 회개운동과 그의 삶
 
이성봉목사의 회개운동은 단지 설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매일의 삶이 바로 회개운동이었다. 먼저 그가 회개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종말론적인 삶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항상 재림의 주를 의식하면서 살았다. 그는 항상 자신을 주님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의 손을 잡고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떻게 함부로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회개는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종말론적인 삶 때문이라고 본다.
 
이성봉목사는 실질적으로 명예와 물질에 초연한 삶을 살았다. 실질적으로 그는 한번도 교권의 중심에 서 본적은 없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에 만족하였다. 사실 그는 교단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그것을 부정하였다. 해방 후 한 때 서울신학교가 그를 이사장으로 모셨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그는 이런 직책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성봉목사는 부흥회를 다니면서 항상 어려운 목사들을 도왔다. 그의 부흥회는 한편으로는 신자를 위한 부흥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려운 목회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들이 중요한 일이었다. 이성봉목사는 아울러서 자신이 받은 사례금을 어려운 교역자를 위해서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의 딸의 간증에 의하면 아버지의 가방에는 돈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은 항상 어려운 목회자들의 것이었다고 한다.
 
이성봉목사는 화해의 상징이다. 1960년대 성결교회도 예성과 기성으로 나뉘어졌다. 원래 이성봉은 이명직과 함께 예성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분열을 그는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비량으로 전국의 교회를 방문하여 일일부흥회를 했다. 이런 그의 화해의 노력 덕분이 1960년대 중반 갈라졌던 성결교회는 다시금 연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합동예배를 드리며, 그는 설교를 맡았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서 그는 소천하고 말았다. 자신이 몸을 드려서 교단의 합동의 제물로 삼은 것이다.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가 그의 자서전 제목이다.
 
7. 이성봉목사의 회개의 특징
 
우리는 이상에서 이성봉목사의 자서전에 나타난 회개를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회개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그는 철저한 회개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신앙을 가진 후 자식을 증인삼아 회개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성봉의 회개는 부모의 회개교육에서 출발한다.
 
둘째, 이성봉목사는 인간 본성의 타락을 믿었다. 그는 신학적으로 원죄를 믿었고, 실질적으로 자신은 죄 중에 태어났다고 고백하였다. 성결교회의 목사인 그는 단지 자범죄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는 죄성, 곧 죄악의 쓴 뿌리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그의 회개 운동이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성봉목사는 구체적인 자범죄를 지적하였다. 이성봉목사는 인간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죄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이 없는 곳에 죄에 대한 구체적인 회개가 없다. 이성봉목사는 죄를 지적한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배척운동을 당하기도 하였다.
 
넷째, 이성봉목사는 자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그의 회개 모습을 보면 단지 하나님 앞에서 혼자 회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증인 삼아서 회개하였다. 그의 부모는 자식을 증인삼아서 죄를 자백하였고, 자신은 아내를 증인 삼아서 연애사건을 자백하였다. 이것은 죄의 고백이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회개 운동의 강점이 있는 것이다.
 
다섯째, 자백에는 변상, 곧 회개의 열매가 강조되었다. 이성봉목사는 죄의 고백에는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치룰 것을 요구하였다. 물질적으로 훔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배상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이 있으면 가서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배상할 대상이 없으면 그것을 교회에 헌금하라고 가르쳤다. 이런 회개 운동은 구체적인 역사로 나타났다.
 
여섯 번째, 변상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이것을 변상할 때 일반사회는 놀라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는 부정한 물질이 많이 있지만 이것을 회개하고, 변상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변상운동은 사회로 하여금 기독교인의 다른 모습을 보게 만들었고, 결국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해 주었다.
 
일곱 번째, 이성봉목사의 회개운동은 신유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성봉은 여러 차례 질병을 앓았다. 하지만 그는 이럴 때 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회개하였다. 이런 신유와 함께 그는 병에서 치유되었다. 죄의 회개는 내면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육체의 치유로 이어진 것이다.
 
여덟 번째, 그의 회개운동은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된다. 이성봉목사는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의 빛 아래서 매일 매일 살았다. 재림의 복음은 자신을 살펴보게 만들고, 다시 오시는 신랑되신 그리스도 앞에서 순결하게 서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회개였던 것이다.
 
8. 이성봉의 회개운동과 그 계승: 최자실의 경우
 
이성봉의 회개운동은 본인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다. 이성봉의 회개운동은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그 가운데서 최자실목사의 경우를 언급하고자 한다. 한국 최대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이다. 그런데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공동창립자가 바로 최자실목사이다. 최자실은 이성봉을 신앙의 아버지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본다면, 이성봉, 최자실, 그리고 조용기로 이어 지는 것이다. 조용기목사는 최자실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최자실은 원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어느 날 이성봉목사의 집회에서 모녀가 은혜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사업에 바빠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최자실은 그 후 월남하였고, 사업에 성공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어머니를 잃고, 큰 딸을 잃고, 사업에 실패하였으며, 남편과 별거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그는 자살을 생각하고 삼각산에 올라갔다가 거기서 다시금 이성봉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부흥회 도중에 자신의 모든 죄가 드러나게 되었고, 이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게 되었다.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옛날의 잘못들이 하늘의 별처럼 되살아 나오는데 나로서는 기억할 수 도 없는 것들이었다.”이런 회개 이후에 그는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최자실의 사역의 출발이었다.
 
이같은 최자실의 회개는 그 뒤에도 이어졌다. 특히 1970년대 초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지을 때, 교회가 건축비로 어려움을 겪자 교회는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하였다. 최자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순서에 있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최자실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자신을 비우는 회개운동으로 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오산리금식기도원이다. 이 금식기도원은 금식과 아울러서 철저한 회개를 강조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용기목사의 축복의 복음과 최자실목사의 금식과 회개의 복음으로 출발하였다고 본다. 이 두가지가 함께 할 때 한국교회는 건전한 교회가 될 수 있다.
 
맺는 말: 이성봉목사의 회개와 한국교회
 
이성봉목사의 회개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졌듯이 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은, 회개와 자백과 변상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갱신했고,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성봉목사의 회개운동은 이것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성봉목사의 회개운동은 성결교회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결교회는 자범죄의 용서와 원죄의 정결을 강조한다. 전자를 중생이라고 하고, 후자를 성결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유와 재림과 연결된다. 이성봉목사의 회개운동은 사중복음적으로 전재된다.
 
이성봉목사의 회개운동은 최자실목사를 통하여 순복음 신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특별히 최자실목사의 금식/회개운동은 오산리 기도원을 통해서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교회는 축복의 복음과 함께 회개의 복음을 외쳐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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