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 목사는 대부흥가요 대성경학자" (3) (뉴스파워 2019. 1. 2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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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영 목사는 “평양대부흥운동의 강력한 역사가 6개월 만에 약화됐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곳이 부산 경남과 제주도였다고 한다 그 요인이 무엇인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도 이상규 교수가 답을 했다.
이 교수는 “흥미롭게도 부산 경남에서는 부흥의 흔적이 없다.”며 “왜 그랬을까. 부산에 있던 호주 선교사들이 1907년 집회 참석 위해 서울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부산 지역에는 다른 기록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성령께서 왜 부산경남 지방에 역사하지 않으셨을까. 나중에 평양대부흥운동이 만주로 확산됐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부산경남에는 없다.”며 “영적 리더십의 문제다. 부산경남 지방은 교세도 약했다. 서부경남 지역은 특히 불교세가 강하고 보수적이다. 이런 지형적 요소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철영 목사는 “정부가 2009년 길선주 목사가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늦게 수여한 이유가 삼일운동에 이름 올렸지만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명혁 목사는 “그런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다. 33인이 같이 모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겨 “이후에도 민족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셨다.”고 말했다.
특히 “천국과 재림을 강조한 것을 비판하는 것은 정신 나간 귀신들린 소리”라고 비판하면서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의 재림을 늘 고대했다. 이런 걸 어떻게 비판할 수 있나.”고 일갈했다.
김철영 목사는 “길선주 목사가 종말론에 심취했고 재림신앙을 강조했다. 길선주 목사는 후천년설을 지지했다. 일종의 가설로 1974년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했고, 2002년에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상규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천국에 대한 소망과 재림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당시 일제하에서 탄압받고 삶이 녹록치 못한 가운데 소망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며 “그 소망의 원천이 복음이었고 결국 종말신앙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당시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등 대부분 사람들은 전천년설을 지지했다. 그런데 길선주는 목사는 독특하게 후천년설을 지지했다. 신앙입국을 꿈꾼 것”이라며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높다 보니 (예수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가설을 세운 것”이라며 “그것을 공표하고 다른 이득을 누렸다면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의 생각이었다. 당시 탄압받고 억압받던 시대에 가질 수 있는 소망이었다.”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길선주 목사는 민족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회개와 기도와 말씀과 전도 그리고 재림신앙을 강조했다. 특히 1907년 평양대부흥 이후 1909년 100만인 구령운동 주창했다.”며 “남북관계 등 국가적, 사회적 현안들이 있다. 한국 교회 안에 정교분리와 정치참여 등 논란이 있다. 길선주 목사의 신앙 활동이 한국교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김명혁 목사는 “요한계시록이 마지막 책인데 ‘내가 보니’ ‘내가 보니’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천국을 바라본다. 이것이 기독교인데 지금 세상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교회가 천국 같고 내 사역이 천국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어거스틴은 『신국론』을 썼다. 정말 행복과 기쁨이 세상에서 이뤄진다고 말하는 것들은 정신 나간 것이다. 그분처럼 (어느 한쪽으로)치우치지 않는 신학자도 없다.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현세는 풀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강조했다. 모세와 다윗 다 그렇다. 현세를 무시하면 이상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실 아닌가.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규 교수는 “보수적일수록 사회 현상과 민족의 현실에 무관심하다. 그 해석이 옳지 않다는 것이 길선주 목사의 삶에서 드러난다.”며 “길 목사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민족 현실 외면하지 않았다. 한쪽 발은 교회, 한쪽 발은 민족에 딛고 살았다.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소망했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이면서 민족 현실에 관심을 가진 독특한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이어 현실에 대해서 신앙을 지키면서 민족 공통의 문제에 대해 함께 협력하고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가 1919년 3.1운동 때 33인이었다. (길 목사가 현장에 없었던 것은) 평양에 있었고 시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2월 21일부터 장대현교회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갈 수 없었고 도장만 찍어서 줬다.”고 말했다.
이어 “집회 마치고 바로 자수하러 서울 내려갔다. 1년 7개월간 미결수로 구금됐다. 결국 무죄를 받았다. 그것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며 “김인서 장로가 해석을 했다. 의도적으로 일제가 정치적 목표를 갖고 기독교 분열을 위해 매장시키려는 의도로 무죄를 내린 것이라고 김인서 장로는 해석을 했다. 길 목사는 1920년 이후에도 체포당했다. 그러므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민족 현실에 무관심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한국 교회에 던지는 길선주 목사의 신앙과 부흥 운동이 주는 메시지에 대해 질문을 했다.
이상규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며 “자기 종교를 지키면서도 타종교와 상호 협력할 필요가 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가 천도교와 손을 잡았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도 각자의 신앙이 다를지라도 민족 현실에 있어서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회개, 기도, 말씀, 전도, 재림신앙 등 다섯 가지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며 “그러나 현실에 무관심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재림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어거스틴도 그랬다. 이 양면성을 배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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