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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목사는 대부흥가요 대성경학자" (1) (뉴스파워 2019. 1. 2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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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CM (14.♡.23.63)
댓글 0건 조회 607회 작성일 19-01-2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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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목사는 대부흥가요 대성경학자"
김명혁 목사-이상규 교수, 길선주 목사의 신앙과 삶을 주제로 특별대담
 

길선주 목사의 회개의 기도와 부흥과 재림의 영성을 염원하며를 주제로 특별대담이 지난 25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도곡동 강변교회(담임목사 이수환)에서 열렸다.

 

이날 대담은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합동신학교 교장 역임)와 이상규 교수(고신대 명예교수, 교회사)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불씨 역할을 감당했던 길선주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해 발표를 한 후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의 진행으로 질의 응답을 했다.

 

김명혁 목사는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를 태동케 한 1907회개운동부흥운동’”의 주역이었다.“길선주 목사는 이기풍 목사와 함께 한국 최초의 일곱 분 목사 중의 한 분이셨다.“고 소개했다.

 

이어 길선주는 본래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는데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29세 때 예수님을 믿은 다음부터 40여 년 동안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는데, 380여 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 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8백 여 명을 목사와 전도사와 장로로 세웠고, 6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는데 두 아들 중 한 사람은 저의 아버지와 함께 평양에서 목회하다가 함께 순교한 김화식 목사라고 개인적인 인연도 소개했다.

 

김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신앙의 강조점으로 회개, 기도, 말씀, 전도, 재림이라며 길선주 조사는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드디어 1906년부터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06년 황해도 재령에서 길선주 조사가 사경회를 인도하는데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9071월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다. 그 사경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 김명혁 목사     ©뉴스파워

 

김 목사는 길선주 목사는 1919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르셨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하셨다.”출옥 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전국을 누비며 사경회를 인도하셨는데 십자가의 복음 전파와 민족 복음화에 남은 생애를 전부 바치셨다.”고 말했다.

 

특히 어떤 무식한 학자는 길선주 목사가 천국 소망에 치우치다가 현세적인 삶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을 했는데 그런 비판은 정신 나간 잘못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길선주 목사는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33인의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고 말했다.

 

길선주 목사님는 193511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져서 35 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갔다.

 

이상규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비록 시인으로서는 한국교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어릴 때부터 한학에 입문했던 그는 한시에 관심을 가진 풍류시인이기도 했다.”초기 장로교 인물인 그는 한국장로교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포삼열은 그를 한국의 스펄젼이라고 불렀다. 김양선은 길선주를 대 전도자이며, 대부흥가요, 대 성경학자라고 평가했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영계 길선주 목사는 한국 최초의 칠인 목사 중의 일인으로서 일찍 유(),(), () 삼교(三敎)를 모두 신봉하여 보았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다가 기독교에 개종한 후에 비로서 인생문제의 해결을 보았고, 구도심(求道心)의 만족을 얻는 동시에 희열과 영력에 넘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어 한국교회 건설의 개척자가 되었다.”그의 달식(達識)은 심오한 성경 연구에 경주(傾注)되어 마침내 저명한 성경학자가 되었으니 그의 묵시록 강해는 가장 저문(著聞)된 바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어떤 의미에서 선교사들보다도 앞서는 대 전도자요, 대부흥가요, 대성경학자였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기독교에 입신하면서부터 조사가 되기까지 신구약성경을 20회 통독했고, 성경의 교훈을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일생동안 구약성경은 30, 창세기에서 에스더서 까지는 540회 통독했다. 신약성경을 100회 이상 읽었고, 요한 일서는 500, 요한 계시록은 1만 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런 이유에서 그는 독경의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구약의 예언서, 시편, 신약의 복음서, 로마인서, 계시록을 포함한 요한 서신 등은 거의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또한 길선주는 개종과 함께 기도생활에도 열중하게 되는데, 아침 5시 혹은 밤 10시 등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기도했고, 정오기도, 그리고 철야 기도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특히 1906년 공개적으로 시작한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독특한 기도관행이 되었다.”그는 새벽마다 묵시록 전체를 20분 동안 암송하고 기도하면서 성경 연구에 심취하였으며, 하루 2-3시간씩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인 목사로는 처음으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20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때가 19083월이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가 종말신앙을 강조했지만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105인 사건때는 맏아들 진형(鎭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19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가담하했고, 이 일로 옥고를 치르고 192010월 출옥했다.”그에게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함께 민족의 현실에 대해서도 동일한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1897년 안창호와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하고 사법부장으로 일한 경우나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한사람으로 가담한 점이 구체적인 사례가 된다. 그는 목회활동과 함께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예수학당을 열었는데 이것이 후일 숭덕(崇德)학교와 숭현(崇賢)여학교로 발전하였다. 그 외에도 남여성경학교와 여러 야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40여 년간 17천여 회 설교하였고, 380~500여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알려져 있다.”휫필드는 일생동안 18천번 설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길선주는 17천여회 설교했고, 삼천리반도는 물론 남북만주에 이르기까지 그가 순회한 거리는 이수(里數)로는 연6천리, 20만 리(8km)에 달했다. 이 거리는 부산-서울 간을 100여회 왕복한 거리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철영 목사의 진행으로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길선주가 여러 종교를 섭렵한 후 기독교로 개종한 것과 관련 이상규 교수는 본인에게 무엇이 참된 종교임을 확신시킨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길선주 목사는 1906년 새벽기도를 시작해 한국교회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타종교에서 새벽에 목욕 재개하는 것 등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기독교에 귀의한지 오래 된 상황이었다. 타종교에서도 좋은 점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에게 맞도록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목사는 “19069월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19071월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길선주 목사는 새벽기도회, 예배당 건물과 예배 형식의 한국화, 남녀 따로 구분해 앉는 것도 폐지했다. 한국적인 토착화를 시도한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다.


 -"길선주 목사는 대부흥가요 대성경학자" (2)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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