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목사는 한국의 사도 바울" (1) (뉴스파워 2019. 2. 22. 16:18) > 신문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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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목사는 한국의 사도 바울" (1) (뉴스파워 2019. 2. 2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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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CM (14.♡.23.63)
댓글 0건 조회 689회 작성일 19-02-2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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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목사는 한국의 사도 바울"
김명혁 목사•강승삼 목사, '한국 최초 선교사 이기풍 목사' 특별대담
 
김현성 
   
김명혁 목사(전 합동신학교 교장, 강변교회 원로)와 강승삼 목사(KWMA 공동회장, 전 총신대 선교대학원장)은 지난 21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도곡동 강변교회(담임목사 이수환)에서 이기풍 목사의 회개의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염원하며를 주제로 특별대담을 했다.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의 진행으로 열린 대담에 앞서 김 목사와 강 목사는 이기풍 목사의 삶과 사역에 대해 소개했다.

 
강승삼 목사는 이기풍은 1868112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기풍은 어려서부터 재치와 슬기가 특출하여 여섯 살 때 사서삼경을 외우고 12살 때에는 붓글씨로 백일장 장원에 뽑힌 바 있다.”반면 그의 성품은 그의 조부의 직설적인 성품을 닮아 그는 어렸을 적부터 거세고 괄괄하고 적극적인 성품이어서 자기의 비위에 거슬려 보이면 참지 못하여 일을 내고 마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다.”고 소개했다.
 
강 목사는 이기풍이 24살 되던 해에 생전 구경한 적도 없는 코 큰 사람을 보았다. 신기한 생각으로 코 크고 체구가 큰 서양 사람이 자신의 눈에 거만한 몸짓으로 걸어가는 꼴을 보고 비위가 거슬려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가는데 그가 바로 Samuel A. Moffett 선교사였다는 것이다.
 
이기풍은 마펫 선교사의 집을 확인하고 돌아가 석전의 명수인 친구 대여섯 명을 이끌고 마펫 선교사의 집 대문을 걷어차고 모아온 돌을 마펫 선교사의 집으로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기왓장을 부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그가 우연히 장터로 지나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군중을 헤치고 가까이 갔더니 서투른 조선말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마펫 선교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돌을 던져 마펫 선교사의 턱에 맞췄고, 마펫 선교사는 피를 흘리며 거꾸러졌다.
 
이 이외에도 이기풍은 건축 중인 장대현 교회를 때려 부수고, 삼일 밤 예배를 인도하러 가던 마펫 선교사의 턱을 날카로운 돌로 상처를 내 흉터가 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강 목사는 이기풍의 마펫 선교사 박해와 건축 중인 장대현 교회를 때려 부수고, 거리낌 없이 횡포를 부리고 폭력을 일삼던 중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기가 던진 돌을 맞고 쓰러진 마펫 선교사의 모습이 마음에 상처가 되고 뉘우치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밥맛까지 잃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박해의 방식으로 성령께서 이기풍을 회심시켜 사용하시기 위하여 마펫 선교사와 만나게 하시고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인데 성령께서 그의 꿈속에 마펫 선교사의 돌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셨다.”그리고 이기풍의 마음속에 마펫 선교사에게 사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품게 하셨다고 생각한다.”며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이기풍에 쓴 기록을 소개했다.
▲ 강승삼 목사     ©뉴스파워
 
이기풍은 1891년 평양 거리에서 나에게 돌을 던지며 박해하던 사람이다. 그는 그때에 영문의 아전(衙前)이었는데 원산으로 이사 가서 그곳에서 회개하고 1896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예수를 믿은 후 소안론 목사의 밥 짓는 사람이 되어 그와 함께 지방으로 순회 하고 열심을 다하여 전도에 힘썼다.”
 
이기풍 목사의 딸 이사례 권사가 이기풍의 회심 증언은 마치 사도 바울의 극적인 회심사건과 유사하다.
 
갑자기 방 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 이다.“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생전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아버지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콧물과 뒤범벅 되어 한없이 흘러내렸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서 아 무리 가슴을 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통곡을 해도 이 죄는 누구에게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강 목사는 성령께서는 이기풍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셨다. 성령께서 그의 세계관을 변화시켰고 그의 삶 또한 변화시키셨다고 믿는다.”성령께서는 그의 적극적이고 진격적인 성격과 기질까지도 사용하셨다. 마치 다메섹 도상의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자마자 증인이 된 것처럼 말이다.”고 밝혔다.
 
이기풍은 해가 뜨면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체력이 왕성한 그는 (30) 피곤한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예수를 증거했다. 그의 전도의 열정은 대단하여 잠시 머물고 있던 집에서 쫓겨날 만큼 극심했다. 성령의 특별역사가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목사는 이기풍은 전도를 위해 이북의 여러 지역을 두루 다녔다. 해주에 머물며 전도하던 이기풍은 교인이었던 김구(金九, 1876~1949)의 모친을 알게 된 계기로 김구와도 친밀한 사이가 되어 김구 선생의 연락원 역할을 한때도 있었고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에 잠시나마 참여한 때도 있었다.”그들은 같은 신앙을 가진 교인이요, 서로가 신뢰하는 관계였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
그래서 이기풍은 독립운동을 위해서 상해로 망명하려고 김구와 안창호를 따라 인천에서 배를 타고 몽금포까지 갔으나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이 너무나 심해 사경을 헤멜 정도가 되어 어쩔 수 없이 홀로 인천으로 돌아와 그들과 이별하게 되었다고 ()이사례가 증언하고 있다.”며 이는 성령께서 그를 전도자로, 그리고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셨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이기풍은 1899년에는 평양으로 돌아와 스왈론 선교사를 도우며 관북지방의 전도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901년에는 장대현 교회 장로 임직을 받고, 동시에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마침내 1903년 봄, 조선 최초로 세워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그의 적극적인 성품과 복음에 대한 열정은 신학교 4년 동안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데 전 힘을 기울이게 했다. 드디어 제1차 한국교회 부흥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해 갔을 무렵, 1907610일 장대현 교회의 뜰에서 역사적인 제1회 평양신학교 졸업식이 거행되어 7명이 졸업했다.”고 밝혔다.
 
특히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는 노회 3일째 되던 날, 전도위원회는 7인의 목사가 탄생한 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정했다.”이기풍 선교사는 19082월경 제주도에 도착하여 1915년까지 제주도에서 17년간 선교사역을 했다.”고 밝혔다.
 
강 목사는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선교전략을 NEVIUS 방법을 적용해 6가지 형태로 섬겼다.”첫째, 이기풍 선교사는 인간관계를 중요시하여 그들의 필요(Felt-needs)를 채우는 섬김의 사역을 통해서 그들에게 진정한 필요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Real-need)을 제시했다. 그는 농번기에는 항상 그들의 농촌의 일을 도왔다.”고 밝혔다.
 
또한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도 미신의 문화적인 인식을 이용하여 전도의 도구로 삼았다.”청년들은 엽전을 돌려 뺑뺑 돌리다가 어느 쪽으로 넘어지면 운수대통, 또는 재수 없음이라는 일종의 점치는 게임을 했는데 그는 엽전을 돌려 이쪽으로 넘어지면 그곳은 천국이요, 저쪽으로 넘어지면 지옥이다.’ 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설명해 홍순홍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밝혔다.
▲ 성내교회 앞 마당에 있는 수백년 된 팽나무     ©뉴스파워
 
강 목사는 이기풍 선교사는 홍수피해 지역에 구제 사역과 난민 섬기는 사역을 통해서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다.”홍수로 떠내려가는 사람들 5명을 구조하고 난민구제 사역을 통해 제주도민들에게 칭찬이 자자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또 한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강 목사는 이기풍 선교사는 조롱 말을 타고 순회 전도사역을 하며 그들의 일손의 필요를 섬기며 복음을 전하여 곳곳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제주도 사역 1년 내 11명의 회심자를 얻게 되었고, 2회 독노회 보고에 따르면 원입 9, 주일 출석 20명이 되었다.”그리고 이기풍 선교사는 팀 사역과 남녀 연합 전도사역의 섬김을 통해서 선교의 결실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기풍 선교사는 성령의 치유 사역과 영적 능력사역으로 주님을 섬겼다.”한 예로서 11세의 다리 장애인 제주 소년(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 판정)을 이기풍 선교사가 7일간 기도 후 걷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교회는 환자들이 많이 찾아 왔다. 그는 성령의 능력과 기도로 축사사역도 섬겼다. 그 결과는 교회부흥의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김명혁 목사는 이기풍 목사를 한국형 사도 바울이라고 칭했다. 김 목사는 이기풍은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였다.”그는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18651223일 평양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릴 때부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미워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이기풍은 서양사람들에 대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음흉한 계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미워했다.”서양 사람의 한 사람인 쌤 마펫 선교사가 이기풍이 지배하고 있던 평양 거리에 들어와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자 깡패 두목인 이기풍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기풍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마포 삼열 선교사의 말이 너무나 듣기가 싫어 그런 말을 못하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부서뜨렸다.”고 밝혔다.
 
이어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수 많은 핍박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끈질기게 전해서 그 이듬해인 1894년에는 22명에게 학습을 베풀었고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마포 삼열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은인이었다.”그는 턱에 돌을 맞고서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십자가와 사랑의 복음을 전한 결과 그는 한국에 이기풍 목사를 탄생하게 했고 길선주 목사를 탄생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한경직 목사를 탄생하게 했다.”고 밝혔다
▲ 김명혁 목사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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